[일러스트=강일구]

[일러스트=강일구]

혜민 스님

혜민 스님

며칠 전 텍사스에서 추신수 선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 책으로 인연이 되어 자주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됐는데, 지난달 타석에서의 성적이 예전보다 좋지 않아서 어떻게 이번 슬럼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를 물어왔다. 외국에서 혼자 외롭게 분투하는 추신수 선수를 보면 내 동생 일처럼 걱정이 된다. 높은 연봉을 받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성적을 내서 팀 우승에 기여하고 팬들의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는 심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먼저 슬럼프를 벗어나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해봤는지 묻자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사실 살다 보면 누구나 이런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추신수 선수와 같은 운동선수의 슬럼프는 아니더라도 본인이 나름 노력하고 있는데도 좀처럼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경우 말이다. 최근 내게도 건강과 관련해 이와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지난겨울 감기를 심하게 앓고 난 후 다른 감기 증상은 사라졌지만 목의 통증은 계속되었다. 정기적으로 소금물로 목을 헹구고 의사에게 항생제를 비롯한 여러 약을 처방받아 치료했지만 지금껏 좋지 않다. 몇 달간 지속된 통증에 컴퓨터단층촬영(CT)도 해보고 한의사에게 침도 맞아봤지만 정확한 원인을 찾을 수 없었고 통증은 여전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내게 질문하는 분들 역시 이와 비슷한 상황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도 성적이 오랫동안 제자리 걸음인 경우, 장사나 사업에 지난 몇 년간 최선을 다해 매진했지만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태, 시댁식구나 친구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을 때 우리는 좌절하고 우울해진다. 교회나 성당, 절에 가서 기도를 해보기도 하고 여타 다른 방법을 모색해 봤지만 이렇다 할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럴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위로가 더 이상 가슴에 와 닿지 않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도대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지금의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일단 현재 상황을 좀 넓은 시야를 가지고 볼 필요가 있다. 파도가 올라갈 때가 있으면 분명 내려갈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파도가 올라가는 것만을 정상으로 여기고 내려가는 것은 비정상으로 여겼던 것은 아닐까? 해가 떠 맑은 날이 있는가 하면 분명 장대 같은 장맛비가 올 때도 있는데 나에게만큼은 계속 해가 떠줄 거라 자만했던 것은 아닐까? 지금 경험하는 내리막길도 우리 삶의 일부로 껴안고 가야 될 내 인생의 몫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지금 경험이 싫다고, 쉽게 짜증내고 불안해하고 남 탓만 한 건 아닌지 한번 돌아보자. 시야를 넓게 봤을 때 지금의 슬럼프는 파도가 다시 올라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하나의 과정일 수 있다. 지금의 경험 덕분에 우리는 다시 올라갔을 때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쉽게 마음이 들뜨지 않고 지혜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지금 상황을 내 안의 자비심을 일으키는 기회로 삼자. 우리는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면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모두 다 자신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착각하기가 쉽다. 그러면서 나보다 성적이나 지위가 낮은 사람, 혹은 몸이 아프거나 관계 안에서 욕을 먹는 사람들을 보면 다 그 사람 탓이라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세상이 그물망처럼 얽히고설켜 있는데 어떻게 그 한 사람만의 잘못일까? 그동안 내 실력만을 과신해서 나보다 힘들고 아픈 사람들의 심정을 잘 몰라주었던 건 아닌지 돌아보자. 내가 지금 상황을 내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듯 그들 역시 아무리 노력해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부분이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번의 슬럼프를 기회로 주변 사람들에게 좀 더 친절하고 따뜻해지자.

 마지막으로 내가 지금 들이는 노력 하나하나가 모여 결국에는 지금 상황을 전환시킨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예전 박찬호 선수로부터 이런 좋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슬럼프에 빠졌건 그렇지 않건, 사람들이 야유를 보내건 그렇지 않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타자에게 던지는 공 하나라는 것이다. 물론 잘 던진 공 하나가 슬럼프로부터 나를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공 하나하나가 모여 결국은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지금의 작은 노력들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자꾸 노력하다 보면 장마에도 끝이 있듯 다시 곧 해가 뜬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추신수 선수의 연속 득점 소식이 들려온다.

혜민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