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닌 것들을 하나하나씩 제거하면서 마지막까지

무엇이 남는지 찾아보는 게 진정한 나를 경험하는 길

[일러스트=김회룡]

5월이 되니 오색 연등 불빛으로 물든 거리가 운치 있고 아름답다. 특히 어둠이 깔리는 시간에 서서히 드러나는 연등 불빛은 귀한 보석을 나무와 나무 사이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듯, 보는 이들의 마음을 환하게 한다. 머리 위를 비추는 따스한 연등 불빛을 받으며 종로 거리를 걷고 있으니 문득 고등학교 시절 이 거리를 걷던 생각이 난다. 사춘기 아이들이 그렇듯 나 또한 어른들이 정답이라고 정해놓은 기준에 대한 반항심이 컸던 것 같다. 특히 남들과 경쟁해서 무조건 좋은 성적을 강요하는 시스템이나 삶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던지면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것이 싫었다.

예를 들어 ‘나는 왜 태어났는가’ 혹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는 대다수의 어른이 이상하게 느껴졌고, 어떻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모른 채로 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 종교학을 공부하고 마침내 머리를 깎고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것도 사춘기 시절 풀지 못했던 나의 근원적 질문들을 해결하고 싶어서였다. 정신 차려 보니 이 세상에 내가 나와 있는데, 도대체 왜 나왔는지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냥 남들과 경쟁해서 그들보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삶의 궁극적 이유라면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너무도 허망할 것만 같았다.

거리를 밝히는 아름다운 연등 불빛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함이 없는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은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변해도 두 번 이상은 변했을 텐데 그동안 나는 그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찾았는지 스스로 궁금해진다. 중간 점검하는 셈치고 한번 차분하게 적어보자고 마음먹으니, 맨 처음 떠오른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바로 나 스스로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서이다.”

즉 처음 물었던 그 두 가지 질문이 각각 다른 질문인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결국 하나의 물음이었다. 그 물음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성현과 석학이 수없이 물어온 질문이다. 최근 유행하는 인문학 강연을 살펴봐도 가장 중요한 주제가 바로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앞에 두고 동서양 고전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많은 듯했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의 강연이나 글을 통해 찾는 것은 또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고전을 참고할 수는 있어도 결국엔 본인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직접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진정한 나를 경험할 수 있을까? 가장 쉬운 방법은 우선 내가 아닌 것들을 하나하나씩 제거하면서 마지막까지 무엇이 남는지를 찾아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보라색 꽃이 있는데 이 꽃은 내가 아니다. 왜냐면 이 꽃은 관찰되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나는 대상화돼 관찰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관찰되는 모든 것은 대상(object)이지 내(subject)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몸도 진정한 의미의 내가 아니다. 왜냐면 몸 역시 꽃처럼 관찰되기 때문이다. 몸 어디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모양이고 하는 것들은 내 안에서 바라보며 관찰할 수 있다.

똑같은 논리로 보면 우리 감정이나 생각도 역시 진정한 나는 아니다. 감정이나 생각도 올라오고 사라지는 것들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화가 났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화가 풀려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억과 같은 생각도 마찬가지로 구름처럼 일어났다 어느덧 자기 스스로 사라진다는 것이 관찰된다. 만약 감정이나 생각이 진정한 나였다면 그러한 감정이나 생각이 사라질 때 나 또한 함께 사라져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몸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고 생각도 아닌 진정한 나는 무엇인가. 나의 경우 몸, 감정, 생각과 나를 동일시하는 버릇을 잠시 내려놓으니 그것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면서 남겨놓는 자유로운 빈 공간들이 있었다. 그 자유로운 텅 빈 공간은 몸 안쪽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몸 밖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시작과 끝, 안과 밖의 구분이 없다. 공간이라고 표현을 하지만 그 공간이 묘하게도 살아서 감정이나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안다. 하지만 그 자체는 앎의 대상이 없기 때문에 모르는 채로 온전히 자유롭다.

오색 연등 아래를 걸으면서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나와 같은 젊은 친구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런 고민해도 괜찮다고. 그리고 그 고민의 끝에서 부디 나만의 답을 직접 경험하라고 응원해주고 싶다.

혜민 스님

원문보기 http://joongang.joins.com/article/123/17807123.html?ctg=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