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망가고 싶은 마음, 어딘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쉬고 싶은 마음.
어쩌면 아무 걱정 없이 우울함에 흠뻑 젖은 솜처럼 축 쳐져 있고 싶은 마음.
지난 2020년 4월, 4500만원이라는 내생애 최대 충동구매를 앞둔 솔직한 심정이었다. 처음에는 위성사진을 먼저 뒤져봤다. 초록색 논 위에 자그맣게 펼쳐진 마을들이 꼭 섬 같은 모양. 이 곳에 집을 사는 건 어렵겠지만 한 번 가보기라도 해야지. 모든 게 엉망인 요즘, 바람이라도 쐬야지. 그렇게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시골에 집을 샀다. 논 한 가운데에. 대지 300평에 매매가 4500만원.
열심히 살았는데 어느새 위태로워진 서울 생활에, 딱 방 한 칸 만큼의 보증금으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까딱하면 다 버리고 도망칠 수 있는 나만의 쉴 곳을 만들어놓고 싶었달까. 누구는 주식으로 얼마를 날렸다던데 4500만원, 나도 주식해서 날린 셈 치지 뭐. (그래도 나에겐 땅이라도 남잖아? 하는 심정) 그런데 집을 사자마자, 모두 다른 하루들이 덤으로 딸려와 자꾸만 말을 걸었다.
시골에 뚝 떨어진 젊은 처자가 궁금한 동네친구 1호, 2호, 3호… 버려진지 10년 째인데도 시시각각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넓은 마당, 저 멀리 드넓은 들판에서 풍경처럼 다가오는 타인의 노동. 그렇게 <오 느른>이 이 시작되었고, 코로나라는 상황에도 내 경험을 영상으로 담아 기록하면서 1년을 보냈다. 눈코뜰 새 없이. 사실 오느른의 처음 기획의도는 오래 된 시골 빈 집 리모델링이었다.

집을 고쳐나가는 과정이 나에게도 재미있고 좋은 경험이자 이런 경험을 꿈만 꾸고 못하는 도시의 어른들에게 분명히 좋은 컨텐츠가 될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020년 약 30편의 에피소드를 연재하면서 그의 반 이상은 ‘집’ 이야기 보다는 ‘사람’이야기로 채우게 되었다. 집이 공사 중이라 길바닥에서 비빔면이나 끓여먹으며 멍때리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늙으면 쓸모 없어진다”는 95세 동네친구의 서글픈 말 한 마디는 나의 철없는 울적함과 무력함을 반성하게 했다. 같이 두손으로 쑥떡을 만들다가 갑자기 친구를 만나러 가야한다는 쿨한 옆집 이여사님(66세)은 지긋지긋한 인간관계에 지쳐있던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 이름 난 산 하나 없지만 한여름에 만난 평야의 푸르름은 그 자체로 삶이었다. 버려진 마당, 호박잎 위의 무당벌레 한 마리마저 허투루 사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꿈꾸던대로 내가 위안 받았던
바로 그 풍경 안으로 들어가,
풍경 속의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덩그러니 동 떨어진 이 집에 살게 된지 6개월 째,
가장 달라진 것을 꼽자면 무엇이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외로움을 타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점일 것이다. 서울에서는 고작 한 달에 한 번 만날까 말까한 친구들, 몇 달에 한 번 볼까말까한 가족들과의 관계마저 피곤함으로 다가와 내가 사람이 많은 것보다는 혼자있는 것을 즐기는 고상하고 우아한 사색가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게 왠 걸, 혼자 밥을 먹으면 온 집이 내가 밥알 씹는 소리만 들리는 이 곳은 진정으로 나 혼자다. 그 흔한 차 한대 지나가지 않는다. 혼자인 게 평화롭고 좋아 행복하던 나는 10분만에 외로움을 탄다.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마을 어르신들과 어찌 그렇게 친하게 지내냐고, 어쩌면 그렇게 살가울 수 있냐고. 마음에 우러나온대로 했을 뿐 특별히 뭘 한 기억이 없는 나는 그리고 그 질문에 항상 겸연쩍곤 했다. 이제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 반대로 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진짜 온전히, 어떠한 방해도 없이 혼자 있어 본 적이 있느냐고. 차 소리는 커녕 인기척도 없는 평야의 밤을 겪어보았느냐고. 어쩌면 내가 매일 그렇게나 동네친구들의 인기척이,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고 반가웠던 이유는 그만큼 외로웠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지난 한 해, 모든 걸 다 버리고 홀로 도망치고 싶던 내가 대면한 깨달음은 아이러니하게도 ‘혼자는 외로워!’ 였다. 덕분에 더 즐거운 일상을 소중하게 마주할 수 있음을 고백한다. 그 때문일까, 4500만원 짜리 115년 된 폐가는 이미 다 고쳐진지 오래인데 나는 여전히 이 곳에 남았다. 외로웠던 나의 곁을 채워준 동네친구들과 함께할 2021년을 살아간다. 여전히 통장 잔고는 마이너스고 골치아픈 고민 중 해결 된 건 크게 없으며, 고달픈 인생살이는 계속되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외롭다는 걸 인정한 후로는 꽤 평화로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글 | 오느른
MBC 디지털 크리에이티브센터 PD
‘오늘을 사는 어른들’ 일명 오느른 유튜브 브이로그의 주인공.
4500만원짜리 폐가를 덜컥 사버린 방송국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