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이 하수상한 요즘, ‘안녕’이라는 말을 주제로 이런 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불현듯 ‘안녕이라는 말 대신’이라는 노래 가사가 입가를 맴돈다.
안녕이라는 말 대신
그대 창에 커텐을 내려도
너와 나 사랑했던 추억의
커텐만은 내리지 말아 줘요…
1988년 강변가요제에서 금상을 받은 이상우의 ‘슬픈 그림 같은 사랑’의 첫 소절이다. ’안녕이라는 말 대신’을 검색해보니 가수 비와 최유리, 써니 힐 등도 이 문구를 제목으로 한 노래들을 불렀다. ‘안녕’은 우리가 누군가를 만났을 때 나누는 인사말이지만, 누군가와 헤어질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니까. ‘안녕’은 생각만큼 간단한 말이 아니다. 지난해 10월 개봉했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룸 넥스트 도어》는 예술영화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이 영화에는 틸다 스윈튼과 줄리안 무어라는 걸출한 여배우들이 나와 죽음의 자기 결정권에 대해 차분하고 우아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룸 넥스트 도어》의 주인공인 마사(틸다 스윈튼)는 뉴욕타임즈의 베테랑 종군 기자다. 하지만 지금은 자궁경부암 3기로 병원에 입원 중이다. 앞으로 몇개월, 길어 봤자 1년 정도 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마사는 고통스러운 치료 대신 존엄있는 죽음을 원한다.

난 잘 죽을 권리가 있어. 존엄을 지키며 퇴장할래. 깨끗하고 깔끔하게.
다크 웹에서 안락사 약을 구한 마사는 오래 전 함께 일했지만 한동안 왕래가 없었던 작가 잉그리드(줄리안 무어)에게 자신의 이별 여행에 동행해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이 죽을 때 옆방[룸 넥스트 도어]에 있어 달라는 것이다.《룸 넥스트 도어》는 全美도서상 수상 작가인 시그리드 누네즈의 『어떻게 지내요』를 원작으로 한다. 이 소설의 원제는 ‘당신은 무슨 일을 겪고 있나요? (What are you going through)’이고, 프랑스어판 제목은 ‘당신의 고통은 무엇인가요?’(Quel est donc ton tourment?)이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가 1942년에 쓴 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 (Quel est ton tourment?) -『어떻게 지내요』122쪽
우리가 나누는 “안녕하세요?”라는 평범한 말에는 실은 ‘어떻게 지내요?’, ‘당신은 (요즘) 무슨 일을 겪고 있어요?’, ‘당신은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어요?’라는 말이 숨어 있다. ‘안녕’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심인 것이다. 물론 모든 고통은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이기에, 우리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어 결국 “그럭저럭이요”하고 얼버무리고 말지만.
소설가 한강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무력감을 느꼈고 그래서 결국 “같이 겪자”는 마음만 남아 『소년이 온다』를 썼다고 말한 바 있다. 또 “타인의 고통을 감지해서 자신의 고통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건 인간의 고귀함을 증언하는 최후의 방어선”이라고도 했다. 그렇게 보면 “안녕하세요”라고 묻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기꺼이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돼있다는 선언과 같은 말이다.
잉그리드는 결국 마사의 마지막 ‘안녕’에 동행하기로 한다. 며칠 뒤 마사는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노란색 수트를 입고 오후의 산들 바람을 맞으며 테라스의 휴식용 의자에 앉아 마사와 세상에 ‘안녕’을 고한다.

마사에게.
오늘은 너무 아름다운 날이라 떠날 때가 온 것 같더라.
네가 아래 방에 없어 다행이야.
비록 원래 계획은 그거였지만. 난 항상 즉흥적이잖아…
넌 타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나와 동행해줬어.
🖋️글 | 이주형 SBS 문화부 영화담당 기자
※ 이 글은 영화칼럼 <씨네멘터리> ”작별이 온다…거장의 ‘옆방’에서 한강의 마음을“을 바탕으로 다시 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