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요구하는 걸 잘했을 때만 가치가 있는 게 아니고,
너는 이미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하고 사랑받을 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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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호주와 뉴질랜드 교민을 위한 법문 요청이 있어 난생처음 적도를 넘었다. 지난해 봄부터 했던 약속인지라 먼 거리였지만 꼭 가야 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나에게 또 다른 약속 하나를 지키는 일이기도 했다. 대학원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는 호주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었고, 꼭 한 번 가본다고 약속한 지가 벌써 10년이 넘었다. 연말이 되면 어김없이 도착하는 친구의 크리스마스카드를 볼 때마다 친구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적도를 넘고 보니 한국과는 날씨가 정반대였다. 법회가 있던 날의 기온이 37도까지 올랐다. 그리고 남반구에선 해가 잘 드는 집을 고를 때 우리와는 다르게 남향이 아닌 북향인 집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주로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강이 흐르고 밤하늘에는 북두칠성이 아닌 남십자성이 빛나고 있었다.

 내가 살던 곳과는 정반대로 달랐지만 법회를 찾은 교민들의 웃음과 마음은 하나같았다. 약속한 법회를 마치고 친구네 집을 찾아 벨을 눌렀다. 활짝 웃는 친구가 문을 열고 반겨주었다.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머리숱이 조금 줄어들고 몸무게가 살짝 늘어난 것 빼고는 똑같아 보였다. 여전히 활달한 친구였고 친구 부인인 제인과도 대학원 때부터 잘 알던 사이라 편했다.

 저녁 식사 후 해가 저무는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시며 어떻게 우리가 벌써 중년이 되었느냐고 한바탕 크게 웃었다. 마음은 아직도 학생 같은데 마흔을 훌쩍 넘은 중년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오랜 친구가 그렇듯 우리는 마음속 무장 해제를 하고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만들어진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는 오랜 친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고 내 편이 되어주는 오랜 친구. 내게 그런 존재인 그는 지난 10년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가다 최근에 생긴 걱정거리 한 가지를 들려주었다.

 그의 걱정은 다름 아닌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진다는 것이었다. 예전부터 이런 증세가 있어 몸과 마음이 지쳐갔는데 최근에는 더 심해진 모양이다. 부인인 제인은 남편이 이러다 몸이 크게 상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일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컴퓨터 앞에서 매일 밤 12시가 넘도록 일만 하고, 잠도 깊이 들지 못하고, 항상 바쁘다는 것이다. 물론 열심히 일한 덕분에 학계에서 인정도 받고 교수 승진도 빨랐지만 일을 멈출 수가 없을뿐더러 계속 불안하다고 했다.

 밤이 되니 제법 서늘해졌다. 모기를 피해 집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친구는 조용한 첼로 음악을 틀고 자신은 차 대신 와인을 한잔 하겠다며 잔을 채웠다. 오래전 친구는 내게 자신의 유년 시절이 참으로 힘겨웠다고 말했다. 화를 잘 내는 아버지는 집 안의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피해 집을 떠나곤 했다.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친구는 장남으로서 여러 동생을 돌봐야 했고 아버지가 언제 또 폭발할지 몰라 늘 전전긍긍하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친구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내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일중독이 되는 원인 중 하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내 존재 자체를 사랑해준다는 느낌보다는 내가 뭔가를 잘했을 때만 부모님께 인정받는다고 느끼면서 자랐을 경우야. 아버지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아버지가 원하는 착한 아들이 되는 거였을 거야. 그렇게 자라 성년이 된 지금은 세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일을 잘해내지 않으면 어렸을 때처럼 불안해지고 내 존재가 인정받지 못하고 무가치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거 같아.”

 친구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불안함의 근원을 찾아보려는 듯했다. “그런데 너는 이미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랑받을 만한 거야. 세상이 너에게 요구하는 것을 잘했을 때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전부터 너는 소중한 존재야. 아직도 불안에 떨고 있는 네 안의 내면 아이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내주고 그 아이를 사랑해줘.” 친구는 눈을 감고 한참을 있다 말했다. “그렇구나.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내 안에 있었구나. 그 아이는 어른인 나에게 자기를 버리고 일만 하지 말고 자기에게도 관심을 가져 달라고 하는 것 같아. 그동안 나는 다른 사람에게만 친절했지 나에게는 하나도 친절하지 않았어.”

 며칠 후 친구 집을 떠나면서 친구의 책상 위에 작은 메모를 남겨 놓았다. “넌 내가 대학원에 다닐 때 여러 번의 힘든 고비를 잘 넘길 수 있도록 도와준 친형 같은 존재야. 너무도 고마웠어. 그러니 꼭 기억해줘. 너는 너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훌륭해.”

혜민 스님(위스타트 홍보대사)

원문보기 http://joongang.joins.com/article/587/17157587.html?ctg=2001&cloc=joongang|home|spec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