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지용

 

“그러지 뭐”

위스타트 홍보대사를 맡아주면 고맙겠다는 내말에 이연복 셰프는 묻지도 않고 그러마했다. 올해 초다. 위스타트가 뭐 하는 단체인지도 잘 모를 터였다. 어떤 대가도 없는 일이었다.

쏟아지는 외부 일정을 소화하느라 쪽잠을 자면서도, 손님들이 줄줄이 늘어서는 자신의 가게 목란의 주방을 지키면서도, 간절히 원하는 곳이 있고 명분이 있는 일이면 어디든 흔쾌히 나서는 사람, 이연복은 그런 사람이다.

중앙일보 주말섹션 week& 2008년 11월 28일자는 커버스토리로 ‘중화요리의 전설’을 다루고 있다. 서울 바닥을 호령하던 중화요리 대가 14명을 한자리에 모은 기획이다. 장홍기, 주업림, 주대흥, 왕육성, 후덕죽, 왕충옥, 조창인, 유방녕, 대장리, 이본주, 여경래, 장명량, 여경옥이 그들이다. 그때 찍은 단체 사진을 보니 이연복은 오른쪽 끝에 서있다. 나는 그때 week& 팀장으로 기획의 진행을 지켜보았지만 이분들과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 뒤, 알고 지내는 박찬일 셰프가 불쑥 말했다.

“진짜 괜찮은 형이 있거든. 칼솜씨가 중식업계서 손가락 안에 들어. 만나보슈”

알고 보니 이연복 셰프였다. 약속한 날 저녁, 세종문화회관 뒤 허름한 횟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는 영락없는 동네아저씨였다. 그날로 배짱이 맞았다. 연식이 아래인데도 그는 나를 친구처럼 대한다.

 

커버용

 

그의 삶에는 신산한 우리 현대사가, 화교들의 고단한 이력이 녹아 있다. 화교소학교 6학년, 열세 살 때 교문을 나서며 배달통을 들었다. 등록금을 내지 못해 벌서는 현실이 싫어서였다. 악착같이 일해 20대에 대만대사관 최연소 주방장에 올랐다. 그만큼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안주하지 않았다. 초등학교와 유치원 다니는 아이 둘을 서울에 떼어두고 일본 오사카로 떠났다. 10여년을 그리 살았다. 아이 키우는 부모는 그 심정을 안다. 삶에 눌리고 치이면서 꾹꾹 다진 이런 내공이, 그러면서도 잃지 않은 선한 마음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고 나는 믿는다. 내 취미가 그림인지라 심심풀이로 얼굴을 그려줬다. 그런데, 연희동 목란의 주방 입구 가림 막에 떡 하니 이걸 새겨 넣고 명함에도 박아 넣었지 뭔가. 사용료 내슈, 응?

서로 바쁘니 자주 만나지 못한다. 어느 날은 그가 전화를 해 중앙일보 스튜디오에 왔다고 했다. jtbc 요리 프로그램인 ‘냉장고를 부탁해’ 녹화 때문인데 마감시간이라 차 한 잔 못했다. 또 어느 날은 내가 목란 근처에 일보러 가며 얼굴이나 볼까했는데 가게 주차장에 차들이 가득했다. 주방에서 일하느라 정신없을 것 같아 발길을 돌렸다.

목란 3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위스타트 소식지에 나갈 사진을 찍은 뒤 중국술 하나를 ‘갈취’해왔다. 아까워하기는커녕 그는 더 좋은 술 없나하고 여기저기를 뒤적였다. 이 술은 올해 위아자 자선행사 경매에 나온다.

그는 불로 팬을 다루고 나는 펜으로 글을 다룬다. 둥근 팬과 뾰족한 펜이, 모두가 신나는 세상을 만드는데 작으나마 힘이 됐으면 좋겠다.

글=안충기 중앙일보 섹션에디터,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newnew9@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