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한 장의 흑백사진을 보고 있다. 머리칼이 하얀 노인 두 분이 손을 꼭 쥔 채 밥상 앞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숙연하면서도 사뭇 정겨운 이 사진 속 인물은 김규동 시인과 민영 시인이다. 두 분 다 우리 한국시단의 큰어른이시다.

2007년 여름이던가, 경남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일 년에 두 번 내던 경남작가회의 기관지였던 『경남작가』에 ‘시의 길을 묻다’라는 제목의 기획대담 꼭지를 마련해 문단의 원로들을 한분한분 만나고 있었다. 고은, 신경림, 민영 시인에 이어 네 번째로 김규동 시인을 대담했는데, 당시 시인은 지병인 폐렴이 악화되어 심한 천식으로 고생하고 있었던 때라 서둘러 지면에 모신 것이었다.

사진은 서울 대치동에 있는 시인의 자택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굳이 점심밥을 사시겠다고 해서 따라 들어선 강남의 어느 한정식당에서 가진 점심식사 장면을 담고 있다. 민영 시인이 김규동 시인을 생전에 꼭 한번 뵙고 싶다고 대담에 배석하신 터였다. 두 분이 이승에서 나눈 마지막 밥상이었으리라.

한국시문학사에서 전후 모더니즘 시운동을 주도하셨던, 책이나 팸플릿 하나라도 보내드리면 16절지 정도의 종이편지를 붓글씨로 또박또박 써서 보내주셨던 김규동 시인은 『경남작가』 와 가진 대담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김일성대학을 다녔다고 밝히셨다.시인은 알려진 바와 달리 평양종합대 조선어문학과를 중퇴한 것이 아니라 연변의대에서 그 무렵 설립한 김일성대학 조선어국문과에 편입했으니 계속 다녔으면 김일성대학 1회 졸업생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셨다. 평양종합대학이 아니라 사실은 김일성종합대학이라는 얘기다. 거길 다니다가 월남해서 이념의 감옥과 같은 한국사회를 살아오며 가슴에 묻어두어야 했던 비밀을 마침내 고백하셨던 것이다. 2012년 대선이 끝나고, 난생 처음으로 안면마비가 와서 병원 신세까지 져야 했다.

보름간의 입원 끝에 퇴원하고 나오던 날, 저녁밥상을 차렸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먼저 내 삶의 중심부터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삶의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흐트러진 일상을 추슬러 세우는 일 아니겠는가. 그렇게 일상처럼 저녁밥상을 시와 함께 꼬박꼬박 차려 내놓았으니.

사람들이 내 밥상과 시에 위로받았다면 그것은 일상의 지속과 건재함에 대한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대리만족일 수도 있겠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역사, 문학 따위 거의 모든 인문학 분야를 그때그때 시사문제와 엮어 가볍게 풀어 쓴 짧은 에세이와 시를 밥상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한 경제전문지에도 동시에 연재하던 것을 간추려 엮은 책이 바로 『시가 있는 밥상』이다.

어쩌다 ‘밥상시인’이라 불리는 내 밥상이래야 밥에 국과 장류를 빼면 많아야 삼찬을 넘지 않는, 어릴 때 어머니가 시골에서 차려주던 밥상 그대로다. 이렇게 혼자 먹는 밥이 아무리 찰진 밥에 기름진 찬인들 어찌 다디달겠는가. 내가 꿈꾸는 밥상은 칼국수 한 그릇, 김치 하나에 보리밥 한 그릇씩이라도 온 식구가 둘러 앉아 먹는 두레밥상, 또는 한뜻으로 모인 사람들이 넓은 마당에 멍석이라도 깔고 한솥밥을 해서 나눠먹으며 우의를 다지는 대동밥상이다. 혼자 밥 먹는 벗들, 아니 혼자 먹는 밥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이들까지 불러 모아 언제 뜨거운 대동밥상 한 번 차리고 싶다, 늦기 전에.

한국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허투루 붓을 놀리거나 더럽힌 적 없던, 마치 초등학생과 같은 너무도 작은 체구를 가진, 그러나 한국시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봐서는 감히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거인이었던 김규동 시인은 까닭을 알 수 없이 자꾸만 목이 메게 하던 어느 하루 점심나절의 이 흑백사진 한 장을 남기시고, 그로부터 5년 뒤 세상을 뜨셨다.

오인태 | 시인
1962년 경남 함양 출생. 『그곳인들 바람 불지 않겠나』, 『혼자 먹는 밥』, 『등뒤의 사랑』,
『아버지의 집』, 『별을 의심하다』와 같은 시집과 동시집『돌멩이가 따뜻해졌다』,
산문집 『시가 있는 밥상』, 이론서 『어린이와 시』를 펴냈다.
경남교육연구정보원에서 교육연구사로 일하면서 시와 동시, 문학평론,
시사평론을 두루 아우르는 글쓰기와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