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동시에 전형적인 가정주부로 두 아이를 기르다 막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어느 해, 살면서 하나씩 끝나가는 것에 대한 허망함으로 무기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남은 시간은 세상에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 우울증에 걸리겠다 싶어 장애인 단체에서 근무하는 지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봉사를 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부분인데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나를 보며 ◌◌엄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시작하자고 하여 자폐장애를 가진 내 아이 또래들을 데리고 사회적응훈련 봉사를 하게 되었다. 장애아를 둔 엄마들을 보면서 나의 무력함이 허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의미 있는 삶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전문적인 봉사를 하려면 관련 분야의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 만학도로 사회복지를 공부하여 2005년 40대 중반의 나이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사회복지사의 길을 걷고 있는 동기가 ‘언니 같은 인재(?)가 봉사만 하기는 아깝다’며 지역아동센터를 소개해주어 그해 7월부터 생활복지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어느 지역보다 열악한 주공임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던 지역아동센터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내가 아직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의 아이들이었다. 2년 넘게 아이들을 보면서 학교교육보다 인성이 바른 사회의 어른들과 가정의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 아이들을 위해 내가 뭘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생활복지사로서는 아이들을 케어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 가지 일을 해 보았지만 금요일이 싫고 월요일이 기다려지는 이런 곳에서 신나고 즐겁게 일할 수 있어 이것은 나의 천직이구나, 이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아 내가 원하는 모델로 운영하려면 직접 개소하는 것이 길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지역아동센터는 허름하고 구석진 곳이 아닌 깨끗하고 조용한 공간이길 바랐다. 아이들이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보고자 지역아동센터가 절실히 필요한 구도심의 주택 밀집 지역에 건물을 신축하여 2008년 4월에 지원지역아동센터를 개소하였다.
개소 후 어느 날, 1학년 여학생이 질문을 했다. “원장 선생님! 이 집이 정말 예쁜데 얼마주고 지으셨어요?” 어떻게 답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아이가 먼저 “100만 원이면 돼요?” 한다. “그럼 여긴 3층이니까 300만 원이고, 우리 집은 5명이니까 400만 원 모으면 4층으로 지어 같이 살 수 있겠네요!” 허름한 주택들 사이에서라도 깨끗하게 지어진 건물에서 생활하며 아이들이 미래의 꿈을 꾼다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원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한지 올해로 만 9년이 되어간다. 지금은 처음 이사 왔을 때 할머니가 끌던 유모차에 앉아있던 아이가 벌써 4학년이 되어가고, 첫 이용 아동이 직장인이 되었다고 간식을 사오고, 대학 합격했다며 가장 먼저 달려와 소식을 알리는 아이들이 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센터를 종료할 때는 나를 눈물짓게 만드는 감사편지를 받으면서 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주 느낀다.
가장 행복한 삶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며 살아가는 사람 아닐까?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묵묵히 하다 보니 좋은 일도 많이 생기고 인정해 주는 부분도 많아 지금의 내가 참 좋다.
내가 꿈꾸는 지역아동센터는…. 지원지역아동센터의 슬로건 “아이들의 눈으로, 행복한 세상을, 꿈꾸게 하는, 무한도전의 장!!”처럼 방과 후 아이들이 편하게 머무는 곳으로, 친구∙언니 오빠들과 부대끼면서 작은 사회를 만들고 그 속에서 나를 믿고 인정해주는 선생님이 계시는 따뜻한 인성이 살아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