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아들을 데리고 을지로에 있는 세운상가를 찾았다. 세운상가는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서울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인 세운상가 리모델링 <다시 세운 프로젝트>로 전시시설, 카페, 창업자들을 위한 오피스, 공방 등 다양한 시설이 입주되어 있었고, 주말에는 벼룩시장 등의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 중이었다. 건축을 하는 필자는 건축 마감재와 조명, 금형 제작 등을 위해 을지로를 자주 찾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주말은 처음이었다.

공방, 힙한 카페와 식당이 줄지어 입점해 있고, 소문난 카페는 번호표로 대기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노포인 고기집 앞 플라스틱 간이 의자와 테이블에는 빈자리가 없다. 북적한 외부 데크 보행로를 지나 세운상가 내부로 들어가니 전자상가가 줄지어 있었다. 너무나 대조되는 풍경이었다. 노래방, 오락실 기계들, 각종 음향기기들이 한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복도에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주말이라 조명이 꺼져 있어 갑자기 70년대로 타임슬립한 기분이었다. 같이 데려간 초등학생 3학년인 아들은 오락실 기계들이 신기한지 만져보고 재미있어했다. 을지로 3,4가는 60년대부터 조명가게, 인쇄소, 공구상, 금형 제작소 등이 밀집되어 있어 서울 산업의 중심이었다.

그러나IMF의 영향과 1987년 용산전자상가로의 전자상가들의 이전, 2000년대 청계천 복원 등으로 많은 점포가 떠나 빈 점포가 크게 증가하였다. 하지만 최근 4~5년 사이에 을지로의 빈 점포에 이색 음식점 카페 등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경리단길, 망리단길 등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자리를 잃은 젊은 창업자들과 예술가들이 임대료가 저렴한 을지로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을지로에서 인쇄업을 하는 친구가 얼마 전, “평소에 자주 가던 ㅇㅇ호프에 최근에 젊은이들이 많이 와서 일찍 가지 않으면 자리가 없어. 술 마시기 힘드네”라며 단골집에 가기 힘들다고 했다. 을지로는 이제 젊은이들 사이에 꼭 찾아야 하는 ‘힙한 장소’가 되었다.

최근, SNS나 언론에서 개성 있고 신선함을 표현하는 ‘힙(hip)’과 ‘을지로’가 만난 신조어인 ‘힙지로’가 대두되고 있다. ‘힙지로’는 뉴트로(Newtro=new+retro; 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경향) 트렌드에 따라,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가게를 중심으로 활성화된 을지로3가와 4가를 일컫는 말이다. 힙지로의 특징은 단연 노포와 신규점포의 공존이다. 젊은 세대에게는 기존에 겪어 보지 못했던 과거의 ‘레트로’한 감성은 낡아서 오히려 새롭게 다가온다. ‘레트로’는 단순한 역사의 재현이 아니다.

역사적인 모든 요소들이 임의적으로 절충과 융합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 즉 과거의 시간을 현대의 시대 상황에 맞추어 재현하는 것이다.

힙지로에 새롭게 오픈한 가게는 일부러 간판을 옛글체로 쓰거나, 버려진 공구, 기계들을 그대로 인테리어 소품으로 쓴다. 상호는 ㅇㅇ가옥, 경성ㅇㅇ, ㅇㅇ구락부 라고 붙인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중장년층들의 경우 이러한 모습으로 향수에 젖지만, 젊은 세대들에게는 새로운 최신 문화이다. 간판이 없어 굳이 찾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공간들도 있기 때문에 SNS를 통해 보물찾기 하듯 찾아가야 한다. 디지털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골목 골목을 지도앱을 사용하여 숨은 그림 찾듯이 찾아간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대신 대기시간을 앱을 통해 알아내 주변에서 아이쇼핑을 하고 알림을 받으면 가게로 들어선다.

우리가 유럽의 도시로 관광을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그 도시에 남아 있고, 그곳에서만 볼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경제적인 이익보다는 도시전체의 이익을 우선한 유럽의 장기적인 도시계획에서 나온 산물이라 하겠다. 힙지로, 그 좁은 골목 안에서 점포들이 생겨나고 있다. 공간의 재미가 없어져 버린 서울에서 기성세대들에겐 향수를, 젊은 세대들에게는 접해보지 못한 빈티지 감성을 선물하고 있다.

세운상가의 옥상데크가 개방되어 있어 올라가 보았다. 북쪽으로는 종묘가 보이고, 양쪽으로 허름한 공구상가들의 지붕이 얼기고 설겨 좁은 골목으로 이어진 풍경이 보였다. 언젠가 서울의 산업을 이끌어온 이 낡은 골목도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써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삶의 향기가 가득한 이곳 을지로를 지키기 위한 도시관계자와 시민들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할 듯 하다.

🖋️글 | 장진희 (건축가)
JTBC 프로그램 <내집이 나타났다>에 출연, 세종대학교 건축공학과에서 겸임
교수로 재 직한바 있다. 현재 스튜디오모쿠의 대표, 신구대 건축학과에서 겸임
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