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다가올 때야말로 그 당연하던 일들을 직접 해야 할 때이다.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을 뿐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는 열심히 식물을 돌보고 있었다. 초록 잎들은 먼지 없이 늘 깨끗했고, 때가 되면 노란색 영양제가 화분에 꽂혀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시하던 식물에 대한 관점을 조금 옮겨보자.

모든 식물이 물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식물은 물이 필요하다. 하지만 식물마다 물이 필요한 양은 다르다. 선인장과 다육식물, 수경식물을 예외로 하더라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식물은 물을 좋아하니까 자주 물을 주거나, 물 주는 사람을 정해 놓지 않아 중복으로 물을 주기도 한다. 물로 식물이 죽는 경우는 물이 마르거나 과습이다. 잎이 노랗게 변했다고 해서 물이 부족한 줄 알고 물을 더 주어 과습으로 죽는 경 우는 생각보다 많다. 한번 물을 주고 나면 화분 속 흙이 잘 마르고 난 뒤 주는 것이 좋다. 계속 흙이 젖어있다면 과습이 되거나 벌레가 생기기 좋은 환경이 된다. 화분과 식물의 크기, 종류에 따라 양과 주기를 정해주는 것이 좋다.

모든 식물이 해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식물 하면 광합성을 외치며 한창 볕이 좋은 여름날 고사리는 베란다에서 지글지글 익어 버리고 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잎이 타 거나 건조해져 식물이 죽기도 한다. 크게 양지, 반양지, 반음지, 음지로 나누며 식물 마다 선호하는 양의 햇빛이 있다. 식물의 종류와 상태에 따라 적절한 햇빛을 보여주자.

아지랑이 같은 소소한 온기가 검붉은 흙 위로 스멀스멀 올라오면, 어느새 작은 초록 잎들은 꼬물거리며 땅 위를 걷는다. 가시지 않을 것 같던 추위는 입김처럼 흩어지고 아직 더디기만 한 녹음을 기다린다. 연노랑 새잎이 계절을 덮으려면 한참은 남았지 만 제법 따뜻해진 햇살에 기분만큼은 벌써 봄이다. 봄이 오면 익숙하게 우리는 하는 일들이 있다. 식물을 들이고 식물을 기르다, 식물을 죽인다.

노랗게 말라비틀어진 줄기를 애써 외면해 보려 해도 휑하게 비어버린 화분 위는 당혹스럽기만 하다. 벌써 몇 번째인지 화분은 그대로이고 식물만 매년 바뀌고 있다. 당신의 식물이 죽는 것엔 이유가 있다. 유독 기르는 것에 소질이 없다든지, 이상하게 엄마의 베란다에서 잘만 자라던 식물이 나에게만 오면 죽는다면 새로운 초록 룸메이트를 만나기 전 식물이 죽는 세 가지 이유를 알아보자.

 

첫 번째 식물이 죽는 이유는 식물을 몰라서이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식물은 늘 보이는 곳에 있었다. 엄마의 베란다, 티비 장 위, 아빠의 서재, 거실의 한켠 등 삶에 늘 밀접했고, 긴밀한 것들은 세심히 보지 않은 법이다. 

모든 식물은 통풍을 좋아한다. 통풍은 균형추의 역할을 한다. 실내의 공기를 순환 시키며 병충해나 화분에 생기는 곰팡이를 막아준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거나 선풍기나 서큘레이터를 이용해 바람이 통하도록 해주는 것이 사람과 식물 모두에게 좋다.

두 번째는 환경을 몰라서이다. 

집안 곳곳 식물을 놓아도 각기 다르게 자란다. 하나의 공간이라고 느꼈던 집은 시간에 따라 머무는 햇빛의 양도 통하는 바람도, 습도도 다르다. 베란다, 침실, 거실 등 각각의 장소는 서로 다른 환경을 조성하고 집집마다도 다르다. 추위에 강하고 햇빛을 좋아하며 통풍이 중요한 식물이라면 베란다 혹은 창가에서 키우는 것이 좋다. 주로 난방을 많이 하는 침실의 경우 건조함에 주의한다. 거실 안에서도 창가 방향과 내측에서 잘 적응하는 식물은 종마다 다르다.

세 번째는 나를 몰라서이다. 

흩어지는 초록의 파편들로 방안 가득하고 싶은 마음에 글썽글썽하지만, 정작 나는 그럴 시간이 없다. 회사 일은 치이고, 출장은 거듭되고, 여유는 바닥이 나 식물에게 온전한 시간 내어 줄 여백이 없다. 지친 눈을 식멍하며 맡기고 싶지만, 식멍보다는 잠이 급하다면 식물을 키우기는 힘들다. 자신의 라이프 스 타일을 돌아보는 것이 먼저이다. 식물의 습성을 알기 전에 나의 성향을 먼저 알아야 나의 속도에 맞춰 함께 살 수 있는 식물을 찾을 수 있다.

식물이 죽는 이유는 당신이 잘 못해서가 아니다. 잘 몰랐을 뿐이다. 세상엔 너무나 많은 식물들이 있고 그 많은 식물 중 나의 삶과 함께 살아갈 식물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 식물을 몰랐고, 나를 몰랐기에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서로를 이해하며 식물을 만나야 한다. 내가 사는 곳, 내가 보내는 시간이 곧 식물이 사는 곳, 식물의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아직 시간이 있다. 너와 나를 알아가기엔 충분한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