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상욱의 짤막한 시 중에 이런 게 있다. ‘그리운 건 그대일까 그 때일까’. 세상이 각박하고 고단해질수록, 사람들은 좋았던 그 시절을 문득 곱씹어 보게 된다.

그때 그 사람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종갓집 지브리 스튜디오가 1995년 내놓은 ‘귀를 기울이면(耳をすませば)’은 ‘그리운 그대’와 ‘그리운 그 때’를 동시에 소환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우리 기쁜 젊은 날’을 반추하고픈 중년은 물론, 이제 한창 풋풋한 꿈을 키워가는 10대에게도 강추하고픈 수작이다.

첫사랑, 진로에 대한 고민, 꿈을 이루기 위한 도전이 오롯이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지브리의 간판 스타이자 애니메이션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신의 후계자로 꼽은 재주꾼 곤도 요시후미(近藤喜文)인데, 이 작품을 만들고 3년 뒤 갑자기 세상을 떠나 지브리 스튜디오를 멘붕상태로 만든 장본인이다.

중학교 3학년 소녀 스키시마 시즈쿠는 여름 방학에도 학교 도서관에 나와 책을 빌려볼 정도의 독서광.

그런데 도서 대출 카드에 매번 같은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아마사와 세이지. 누굴까, 이 아이는. 어느 날 길냥이에 이끌려 골동품 가게로 들어가게 된 시즈쿠는 그곳에서 일하던 할아버지를 만나고 우여곡절 끝에 할아버지의 손자와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이미 구면. 시즈쿠가 바꿔 써놓은 존 덴버의 노래 ‘테이크 미 홈, 컨트리 로드’의 가사를 제멋대로 읽고 비아냥댔던 그 녀석이다.

그런데 그 재수없는 녀석이 알고보니 빌려보려는 책마다 선수를 쳤던 ‘세이지’였고, 남들처럼 진학하는 것이 아니라 바이올린 제작 장인이 되기 위해 이탈리아의 공방으로 유학을 떠나겠다는 청운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니, 시즈쿠로서는 한방 먹은 느낌이다. 여전히 뭘 해야할지, 뭘 하고 싶은지 잘 모르는 그녀로서는 더욱. 이쯤해서 대충 눈치채셨듯, 이 둘은 이제 알콩달콩 첫사랑의 감정에 젖어든다. 그러나 이들은 ‘우린 아직 학생이야’라는 건전한 다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대견하게도. 세이지가 유학을 떠나기 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시즈쿠는 그런 세이지에게 자신도 꿈을 찾기 위해 더욱 노력할 테니 멋진 모습으로 만나자고 말한다. 온 몸에 닭살이 돋고 오글거린다고? 그런 말 마시라. 오글거리니까 청춘이다. 장래가 불안한 10대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 그것을 믿고 ‘무소의 뿔처럼’ 과감하게 앞으로 가라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는 것이 이 작품의 미덕이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삶이란 현실과 환상 사이 어디쯤에 있는 것이라고 넌지시 알려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내가 무엇을 해서 먹고살 수 있을지 10대에 어떻게 알겠는가. 20대에는 알 수 있을까. 진로에 대한 고민은 청춘이라면 누구나 겪고 있고 또 겪어야 하는 문제다. 정답이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으로 깊숙히 들어가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는 것일 터다. 그런데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직업과 어린 시절의 연관성을 조사한 한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10살 무렵 자신이 좋아했던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작품속 시즈쿠는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장래 희망이랄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세이지 덕분에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게 되고, 결국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소설의 단초가 되는 골동품점 고양이 인형 바론은 시즈쿠의 손 끝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그것이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파랑새가 기실 자기 집 정원에 살고 있었던 것처럼, 내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 불안한가. 너무 걱정 마시라. 생 자체가 원래 불안한 것이다. 골동품점 할아버지가 미래에 대한 자신이 없는 시즈쿠에게 들려주는 삶의 주인이 되는 지혜는 그래서 곱씹어 들을 만 하다. “자기 안의 원석을 찾아내서 오랜 시간 동안 다듬는 거란다.” 마침 이 애니메이션이 일본에서 실사 영화로 제작돼 올 가을 찾아온다는 소식이 2020년 1월을 장식했다. 시즈쿠와 세이지의 10년 뒤 모습이란다. 부디 ‘그리운 그대와 그 때’를 온전히 살려내 주길 기원해본다.

🖋️글 | 정형모(문화전문기자)
중앙컬쳐앤라이프스타일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