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부터 노숙인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직업.” 오래 전 누군가 기자 일의 속성을 물었을 때 내가 했던 대답이다. 왜 기자 일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도 비슷한 답을 하곤 했다. “나와 다른 이들을 만나 매일매일 많은 걸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신문 기자에서 방송 기자로, 일선 기자에서 국장으로, 뉴스 보도에서 시사•교양물 제작 담당으로 그동안 내가 하는 일의 영역이 차츰 달라지고 넓어지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만남이 일의 중심인 것엔 변함이 없다.

포맷과 성격이 각기 다른 여러 프로그램들을 만드는 요즘은 정치인•법조인•학자들부터 래퍼•가수•배우들까지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교류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그런 내게 지금껏 가장 깊은 울림을 주었던 만남을 꼽아보라고 하면 으레 떠오르는 이들이 있다.

바로 자폐아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다. 중앙일보 기획취재팀에서 일하던 2001년 여름, 한 달여 동안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를 나눴던 분들이다.
당시만 해도 자폐는 원인도, 증상도, 현황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낯선 질병. 그러다 보니 이들은 병마는 물론 숱한 오해 및 편견과도 맞서 싸워야 하는 처지였다. 취재하던 내내, 아이와 부모들이 겪는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이유다.

부모들은 아이가 어디로 튈지 몰라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고, 혼자 만의 세계에 갇혀 눈맞춤조차 해주지 않는 아이와 24시간 붙어 지내야 하는 고통을 눈물로 토로했다. 장애아를 돌보는 사회적 시스템의 미비 탓에 무거운 짐을 홀로 짊어져야 하는, 그래서 “아이보다 하루 더 사는 게 유일한 소원” 이라는 이들을 보며 기자로서의 소명을 새삼 되새기게 됐다. 우리 사회가 힘없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결코 잊지 않도록, 공동체 차원의 노력을 일깨울 수 있도록 내 몫의 할 일을 다하겠다는 다짐 말이다.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그 때 그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나를 울컥하게 만들곤 한다. ‘스포트라이트’를 주제로 한 이번 위스타트 소식지에 “소외된 구석을 조명했던 경험을 글로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당시의 일을 우선적으로 떠올린 이유다. 물론 기사 한 꼭지, 방송 프로그램 한 편이 세상의 많은 것을 한꺼번에 바꿀 수 없단 걸 잘 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가장 약한 사람들이 살 만한 사회를 만들 때 우리 모두의 삶의 질도 나아질 거라 믿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수 밖에.

JTBC 보도제작국의 간판 프로그램인 <차이나는 클라스-질문 있습니다>를 통해 약자들의 인권과 복지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온 것도 그래서다. 2017년 8월 방영된 폴 김 스탠퍼드대 교수 편이 대표적이다. 교육공학자인 그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제3세계 어린이들을 위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초소형 IT 기기를 개발해 보급하기도 하고, 세계 곳곳의 아이들이 각자의 삶을 구술한 내용을 책으로 엮어 주는 열성적인 운동가이기도 하다. 우리가 왜 굳이 머나먼 르완다와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아이들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그는 이런 답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지구는 하나의 마을이 됐고 우린 너나없이 세계 시민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석을 보면 출생일과 사망일 사이를 이어주는 작은 선이 있어요. 그게 바로 인생이죠. 결국 인생은 그 작은 선 하나 같은 거예요. 그토록 짧은 인생을 뭘로 채워야 할까요? 나를 변화시키고, 무엇을 공부하고,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키고 더 나은 국가와 더 나은 지구촌을 만들지에 대한 질문들을 많이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듯 인상 깊은 말로 강연을 마무리한 폴 김 교수는 출연료 전액을 위스타트에 기부하는 모습으로 나를 포함한 제작진 모두를 다시 한번 감동시켰다. 이를 계기로 <차이나는 클라스-질문 있습니다> 팀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받은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상’ 상금을, <사건반장> 팀이 사내 시청률 우수상 상금을 연이어 위스타트에 내놓기도 했다. 부디 이 작은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를!

🖋️글 |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중앙일보에 입사해 20년간 신문 기자로 일하다 JTBC 개국과 함께 방송으로 영역을 옮겨서 앵커와 뉴스 제작을 겸하게 됐다. 현재는 보도제작국장으로 <차이나는 클라스-질문 있습니다>, <밤샘토론>, <뉴스현장>, <사건반장> 등의 프로그램 제작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