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꿈과 함께하는 위스타트의 ‘위대한토크’ 연사로 함께해 주셨던 유홍준교수와  혜민스님이 함께 만났습니다. 의미있는 만남 속에 혜민스님이 유홍준 교수님을 인터뷰 하였습니다.

유홍준 “일본이 아무리 왜곡해도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혜민스님 “인인유책 마음가짐으로 세월호 상처 치유해야”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나는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라고 외치는 한 권의 책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한류라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내 주변 젊은 사람들의 관심은 주로 서구 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과 모방에 있었다. 그때 만난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밖으로만 향했던 내 눈을 안으로 돌려 우리 문화유산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했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잠들어 있던 우리 보물들의 가치를 새삼 일깨워주었다. 내가 어느새 유홍준 교수님이 처음 책을 쓰셨을 때의 나이가 되었다. 나보다 한 세대를 먼저 살아온 이 시대 어른을 만나 이제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더불어 나 같은 다음 세대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게 사는 삶인가에 대해 여쭙고 싶었다.

2년 동안 일본을 돌며 일본 문화유산 답사기 4권을 완간한 유홍준 명지대 교수(왼쪽). 지난 6일 오후 중앙일보 유민라운지에서 혜민 스님과 나눈 대담에서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는 이유에 대해 “난초를 그려 세상을 위해 애쓰는 사람을 위로하듯 책을 통해 많은 분들에게 위안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년 동안 일본을 돌며 일본 문화유산 답사기 4권을 완간한 유홍준 명지대 교수(왼쪽). 지난 6일 오후 중앙일보 유민라운지에서 혜민 스님과 나눈 대담에서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는 이유에 대해 “난초를 그려 세상을 위해 애쓰는 사람을 위로하듯 책을 통해 많은 분들에게 위안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인터뷰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혜민 스님이 불러줘 나왔습니다. 잠시 멈춘다는 것의 가치, 곧 지(止)의 미(美)를 일깨워 우리 젊은이들 마음에 많은 희망과 위안을 제시해준 것이 고마워서요.”

 -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교수님.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직접 본 유 교수님은 키가 훤칠하고 머리숱이 많으셔서 그런지 연세보다 훨씬 젊어 보이셨다. 워낙 말씀을 잘하셔서 이어령·김용옥 교수님과 더불어 걸어 다니는 우리나라 ‘3대 교육 방송’이라는 애칭도 가지고 계시는데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해주실지 자못 기대가 되었다.

 -먼저 교수님의 젊은 날이 궁금합니다. 1967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하셨는데 80년이 돼서야 졸업을 하시고, 그 사이 어떤 곡절이 있으셨는지요.

 “젊은 날의 저는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 찬 낭만적 청춘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술학을 전공하는 평론가, 교수가 되고 싶었지요.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교수라는 직업을 갖는 것이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가 않았어요. 그런데 69년 삼선 개헌 후 독재정권 저지라는 정치적 과제가 생기면서 당시 저 같은 대학생들은 현실이 망가져도 학문의 순수성만 내세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삼선 개헌 반대 데모 뒤 무기정학을 당했고 얼마 있다 징계가 풀렸지만 71년 군대로 끌려가 74년 만기 제대 후 다시 데모를 하다가 체포돼 징역 7년을 선고받았습니다.”

 - 감옥에서 7년 동안 복역을 하셨어야 했나요.

 “다행히 1년 뒤인 75년 2월 형 집행정지로 출소를 하게 되었지만 80년 3월까지 복학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정 형편상 취직을 해야 했는데 졸업도 못하고 형 집행정지 상태여서 취직도 어려웠지요. 간신히 지인의 도움으로 ‘공간’ 편집부에서 일하다가 중앙일보에서 새로 창간한 ‘계간 미술’에 경력 사원으로 입사해 83년까지 일을 하게 되었지요. 그 안에서 ‘한국의 미’ 시리즈를 맡으면서 전국 곳곳의 유물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는데 저에게는 마치 임상시험을 경험하는 인턴 생활 같았고 제 미술사 연구에 엄청난 자산이 되었습니다.”


 #많이들 묻고 그만큼 대답해서일까 교수님의 인생 이야기는 간략했지만 그 안의 내용은 간략하지 않았다. 교수님은 이후 간신히 대학 졸업장을 받고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16가지나 되는 서류를 넣어 교수 채용에 응했다. 나 역시 미국에서 교수 채용을 위한 온갖 서류를 작성해본 경험이 있기에 교수님의 그 과정이 얼마나 지난했을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교수님은 한 대학에서 임용 통보를 받은 지 하루 만에 형 집행정지라는 신분이 문제가 되어 바로 취소 통보를 받았다. 심하게 좌절하거나 세상을 원망했을 법한데 교수님은 내친김에 교수 임용됐다고 다니던 회사에까지 거짓말을 하고 거리로 나와 한국 미술사를 대중에게 가르치는 삶을 택했다. 

 “만약 그때 바로 임용됐다면 지금처럼 살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때 ‘계간 미술’까지 그만두고 미술 평론가 활동을 하면서 신촌 우리마당에서 ‘젊은이를 위한 한국 미술사 공개강좌’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때가 85년이었죠.”

 -그러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한국 미술사 강의를 그때부터 하신 것입니까. 당시만 해도 일반인에게 오픈돼 있는 인문학 공개강좌가 지금처럼 많이 있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 당시에는 나 하나였겠죠. 마당에 거적을 깔았어요. 미술대학이 있는 서울대·이화여대·홍익대에 포스터 3장 붙이고 시작했는데 처음엔 30명이 왔는데 다음엔 100명이 훌쩍 넘어버렸습니다. 그 학생들에게 한국 미술사를 포교하고자 하는데 마땅한 바이블이 없으니 내가 선택한 것이 바로 직접 현장을 데리고 다니면서 답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모태가 된 것이죠.”

 - 그렇군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어느 날 갑자기 홍두깨처럼 나온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한 오랜 대중강의와 답사 활동 속에서 탄생된 것이군요.

 “그 책이 나오기 전까지 저변에 깔린 시간이 10년입니다. 누가 돈 주고 책 내줄 테니 쓰라고 했으면 못 썼을 거예요. 처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원고는 91년 ‘월간 사회평론’ 창간 때 원고료 없이 쓰게 된 글들입니다. 그런데 제 첫 번째 글을 보고 백낙청 선생님께서 그 글의 가치를 인정해주시며 나중에 창작과비평사에서 책으로 내자고 찾아오셨습니다. 그 당시 백낙청 선생님은 저에게는 롤모델, 나아가서는 지존이나 다름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나온 유홍준 교수님의 첫 번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3만 부 정도 팔리지 않을까 출판사에서 예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인쇄소가 쉬지 않고 찍을 정도로 독자들이 찾았고 1년이 지나 100만 부를 돌파했다. 소설이나 에세이가 아닌 인문학 책이 그렇게 팔린 것은 가히 일대 사건이다. 독자였던 나 역시 그 책을 읽고 얼마나 반성했던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인다고 했던 유홍준 교수님의 말씀에 나는 그동안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사랑할 줄도, 관심 갖고 제대로 볼 줄 몰랐다는 점이 심히 부끄러웠다. 교수님은 내 삶에 하나의 지표가 되어줄 말씀을 이었다.

 “자신이 공부하고 연구한 것을 동시대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사회적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적 깔고 대중 앞에 나설 때 사실 저는 무슨 배짱으로 했는지 모릅니다. 다만 ‘나는 우리의 전통과 미술사를 이렇게 이해했다’라는 정도라도 전하고 싶었던 거죠. 그것이 전문인으로서 대중에게 봉사하는 길입니다. 저는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할 수 있는 처지도 못되었고 그런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전문적인 지식을 나누어 쓰겠다는 생각, 그 생각이 미술사학자로서의 제 사회적 실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이번에 완간한 답사기 일본편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4권으로 일본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셨는데요, 어떤 이유로 일본 미술사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제가 일본 미술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일본 미술사는 한국 미술사가 밖으로 뻗어나간 외연이기 때문입니다. 삼국시대 불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앞 머리에서는 중국에서 받은 것이 나오고, 뒤로는 일본으로 간 것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88년 일본 아스카 지역을 처음 탐방하게 되었을 때부터 일본 문화유산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일본이 아무리 역사를 왜곡한다고 해도 결국 남아 있는 뼈와 돌과 사금파리와 같은 유물들이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유물로써 이야기한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 일본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우리나라 독자에게 알리고 싶었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우리는 일본에 대해 너무 모릅니다. 일본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일본의 역사적 인물로 아는 사람을 말해보라 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토 히로부미가 전부입니다. 그래 놓고 ‘일본의 고대 문화는 죄다 우리가 만들어준 것’이라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중국 사람들이 우리에게 ‘죄다 중국이 다 해준 것이다’고 한다면 우리는 기분이 좋겠습니까. 일본을 알고 보면 우리에게 영향 받았지만 결국은 본인들의 문화로 발전시킨 예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그들의 성과로 인정해주어야죠. 남의 것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발달된 것을 가져다 쓰는 것을 요즘에는 벤치마킹이라 하지 않습니까. 발달한 건 갖다 쓰는 사람이 임자이고 그것이 문명 발전의 한 방향이기도 합니다.”

 -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일본 문화에서 이런 점은 진작에 벤치마킹했으면 좋았겠다 싶은 면이 무엇입니까.

 “장인정신이죠. 일본 천태종을 세운 사이초(最澄·767~822) 스님이 했던 경구 중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 가지 구석 중에 한 가지만 비추어도 이것이 곧 국보이다(照千一隅 此則國寶).’ 즉 한 가지 일에 충실하면서 살아가면 그것이 대접받고 귀하게 여겨지는 사상이 천년 전부터 일본에는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천민 취급받던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서 장인대접 받고 죽어선 신사에 신으로까지 모셔진 사례도 있지 않습니까. 일본은 실력이 있는 사람을 인정해주고 직업에 귀천을 따지지 않았고 이런 장인정신과 직업윤리 의식 덕에 일본 사회가 건강하게 올 수 있었던 토대가 된 것 같습니다.”

 - 안타깝게도 지금의 한·일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교수님 보시기에 양국 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우리가 한·일 관계 2300년 교류에서 정말로 나빴던 적은 단 두 번밖에 없었습니다. 임진왜란 7년과 일제 식민치하 35년입니다. 유럽의 경우 영국과 프랑스는 100년 전쟁을 했고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나폴레옹이 쳐들어가니까 나중엔 히틀러가 쳐들어가지 않습니까. 보불전쟁도 30년을 했잖아요. 그런 것에 비하면 우리와 일본은 괜찮은 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최근세에 있었던 과거사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과거사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전 우리 조상이 임진왜란 후 어떻게 그 문제를 풀었는지가 그 답을 준다고 봅니다. 임진왜란 뒤 과거사 문제를 청산하기 위해 우리 정부가 요구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왕릉을 파괴한 도굴자를 찾아서 처형하는 것, 또 하나는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송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에도 막부는 조선과 문을 트기 위해 두 명의 도굴범을 보냅니다. 그들은 죽을 목숨이었던 사형수로 비록 가짜였지만 조선 정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성의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처형합니다. 그 다음 끌려간 포로 문제에 대해서는 사명대사를 사신으로 보내 3000명을 본국으로 데리고 오게 합니다. 그 후 서로 신뢰가 통한다는 뜻에서 통신사(通信使)라는 이름으로 1811년까지 아홉 차례나 교류를 합니다. 이처럼 우리 조상이 했듯이 독도 문제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은 명확히 사죄하고 우리 정부도 사과를 확실하게 받아 해결을 하면 그 다음 현안에 크게 걸릴 것들이 없습니다.”


 #교수님을 뵈면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학생들이 내게 싸이에 대해 묻고 한국 드라마에 대해 묻는다. 어떨 때는 내가 도리어 미국 학생들에게 한국 아이돌에 대해 물어야 할 때도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생각지도 못한 현상이다. 세계로 뻗어가는 우리 문화를 보며 교수님께 다음 세대들이 노력해야 할 부분에 대한 조언을 얻고 싶었다.

 - 옛날과는 다르게 우리나라 가전제품은 물론 대중문화가 세계 시장에서 각광받고 있습니다. 교수님은 이와 같은 현상을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우리가 만든 제품이 우수하고 또 우리가 이룩한 문화의 내용에 공감하기 때문이죠. 사실 우리는 열심히 살았을 뿐이었지 세계가 우리를 이렇게 따라올 줄은 몰랐던 것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세계를 배우려고 노력했고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세계도 배웠고 우리 것도 발전시켰습니다. 우리의 문화 창출에 이미 세계적인 것이 녹아 있었던 거죠. 그것을 세계인들이 좋아하고 인정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제품이 좋으니까 사는 것이고 우리 드라마가 재미있고 대중가요가 신나니까 따라 하는 겁니다. 대단한 결과죠.”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더 발전하고 확장돼 갈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역사적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세계 문화를 주도해본 역사적 경험이 단 1초도 없습니다. 우리가 2등일 때는 편했습니다. 2등은 1등 뒤통수만 바라보고 뛰어가면 되기 때문에 기술과 노력으로 따라가면 됐습니다. 하지만 1등을 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1등은 어디로 갈까 방향을 정해야 하고 뒷사람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거기엔 기술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거든요. 방향을 잡는 것은 더 이상 전자공학의 문제가 아니고 심리학이나 인류학 같은 인문학적 사고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 결국 새로운 방향을 잡고 세계를 계속해서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토대를 지금 잘 마련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예를 들면 일본은 1970년 오사카 엑스포 건물에 민족학 박물관을 만들었어요. 그곳에서 100여 민족의 의식주생활, 신앙생활, 언어생활 등을 연구하는데 몇 백 명의 큐레이터를 고용하고 반드시 각 나라의 연구자 한 명씩은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일본 회사들이 우간다에 제품을 가져간다 했을 때 주재원은 민족학 박물관 큐레이터로부터 우간다의 모든 정보를 받아서 가고 또 그곳에서 몇 년 근무했던 내용을 이 연구원에게 주어 자료를 축적합니다. 우리의 한류가 계속해서 퍼져나가기 위해선 앞으로 더 퍼져 나가야 할 지역, 이를테면 남미·아프리카·아랍 각국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국가 차원이든 기업 차원이든 해나가야 할 문제입니다.”

 - 교수님 개인적으로 후배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요.

 “사실 내가 후배들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제 책을 잡아먹는 책들을 써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답사기를 미술사가 입장에서 썼습니다. 그렇다면 민속학자나 국문학자, 역사학자도 똑같이 쓸 수 있는 주제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나는 아날로그 시대의 사람으로서 썼지만 지금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감성으로 나를 밟고 넘어가는 책들을 써주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내가 내 책들로부터 해방되는 길이고 원하는 바입니다.”


#“난초를 그리는 이유는 세상을 위해 애쓰는 이를 위로하고 싶어서이다.”

 지금까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360만 권 넘게 팔렸다. 일본편 4권을 2년 만에 완간한 저력에 대해 다들 놀라워하며 왜 이렇게 빨리 가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교수님은 딱 잘라 말씀하셨다. “나는 빨리 가려는 게 아니라 멀리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수님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편까지 쓰실 계획인지 물었다.

 “사실 그게 지금 고민입니다. 현재 국내 답사기를 강원도에서 충청북도, 경기도로 이어지는 남한강 편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끝나면 서울 편을 쓰고, 그리고 강화도·보길도·거제도·울릉도 등 섬 이야기를 쓰면서 독도답사기를 끝으로 하여 열 번째 책으로 마무리하려 합니다. 그러면 내 나이가 70이 될 텐데 중국을 쓸 것인가는 그때 가서 생각해봐야겠지요. 만약에 쓴다면 중국은 세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만주에 있는 고조선·고구려·발해·독립운동 유적지이고, 또 하나는 동양문화의 원천으로서 위대한 중국 문화 유산의 답사이고, 또 하나는 연행사신을 비롯해 우리 조상이 중국을 어떻게 경험하고 어떻게 인식했는가입니다. 그중 세 번째 관점에서 중국답사기를 쓰고 싶네요.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추사 김정희 같은 분들의 기행문과 행적을 따라가는 답사기죠.”

 -교수님에게 미(美)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미를 바라볼 때 자기가 추구하는 어떤 미적 가치 하나로만 미를 보려 하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를 보려 할 때는 우선 감성을 열어놔야 합니다. 한번은 석굴암 안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답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박사 과정에 있는 한 학생이 석굴암에 들어가서 한도 없이 우는 거예요. ‘너 왜 우니?’ 물었더니 ‘몰라요, 그냥 눈물이 나요’ 하더군요. 석굴암을 봤을 때 넋을 잃거나 무릎을 치거나 울거나 셋 중 하나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미란 그런 것입니다. 자기의 감성이 아름다움에 의해 순화돼 완전히 비워지는 경험인 것이지요.”

 - 저도 음악을 들을 때 종종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시간이 완전히 멈춰버려 온전히 비워진 채로 충만한 느낌 말이지요. 그런데 지금 같은 바쁜 시대에는 그런 아름다움을 잊고 사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 같은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인간을 이야기하고 문화유산을 이야기하고 예술을 이야기하면서 국민에게 기쁨을 주고 위안도 되고 우리 문화를 끌어올릴 수 있는 활동을 축적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저는 그리 생각하며 열심히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가끔 난초를 쳐 제자들에게 결혼 선물로 주는데, 거기에 정판교가 한 이야기를 잘 인용합니다. ‘내가 난초를 그리는 것은 이것을 가지고 내가 즐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난초를 그림으로써 세상을 위해 애쓰는 사람을 위로하고 싶어서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이념이나 세대, 빈부차 등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데요, 서로 존중하고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에는 사람들을 좌우로 단박에 분류하고 편가르기를 해야 속이 편한 사람들을 보게 돼요. 그런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고 형태는 굉장히 다양합니다. 예를 들어 정치적으로는 좌파면서 경제나 여성문제는 우파인 경우를 봅니다. 즉 어떤 라인을 긋고 왼쪽이냐 오른쪽이냐로만 볼 수 없는 영역이 우리 삶 속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인터뷰를 하러 들어오는 교수님 손에는 개나리처럼 노란 부채가 하나 들려 있었다. 내가 미리 보낸 질문지를 보고 부채에 글씨를 써서 가지고 오신 것이다. 인인유책(人人有責). ‘세월호가 가져온 상처에 대해 어떻게 우리가 치유하고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셨다.

 “타이태닉 선장의 이야기 중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타이태닉 침몰 시 선장이 마지막까지 진두지휘하면서 한 이야기예요. ‘Be English!’ 즉 영국인답게 행동해라! 만약 누군가에게 ‘한국인답게 행동해라!’라고 말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한국인답게 행동하는 것인지 우리는 아직 명확하게 잘 모릅니다. 만약 우리에게도 축적되고 이어온 교양과 사상, 이를테면 선비정신 같은 것이 굳게 자리 잡고 있어 ‘선비답게 행동하라’고 했었다면 세월호 사건은 다른 이야기가 됐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월호의 아픔을 어떻게 새겨야 하나라는 질문에 인인유책(人人有責),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두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은 언제 행복하세요.

 “일할 때, 글 쓸 때 행복합니다. 무아지경이지요. 새로운 걸 알았을 때의 기쁨, 내가 애매하게 알았던 것을 제대로 알았을 때의 기쁨은 말도 못합니다. 잠도 못 자죠.”

 두 시간 정도 예상한 만남이 네 시간이 넘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흘렀다. 나로서는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이 무아지경이었다. 최치원이 지증대사에 대해 쓴 비문 내용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다고 한다. 지증대사는 홀로 깨치기를 좋아하고 남을 가르치기를 마음 쓰지 않았다고 하는데 한 나무꾼이 나타나 ‘먼저 깨우친 자가 나중 깨칠 사람을 위해 배운 것을 가르치는 데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꾸짖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스님은 법당을 세우고 대중을 향한 법회를 열기 시작했다고 한다. 본인이 배운 것을 다음 세대에게 끊임없이 나누어 주시려는 유홍준 교수님의 청년 같은 열정을 보면서 이 시대의 지식인들이 어떻게 사회적 실천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은 것 같다.

유홍준은 …

1949년생.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81년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미술평론가이자 미술사가, 미술저술가다. 영남대 교수와 박물관장을 지내고 문화재청장으로 일했다.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정년 퇴임한 뒤 현재 석좌교수로 일하고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가 대표작이다. 93년 1권 『남도답사 일번지』를 펴낸 이래 국내편 7권과 일본편 4권을 내놨다. 한국 인문서 최초로 전국에 답사 열풍을 일으켰다. ‘아는 만큼 보인다’를 내세우며 한국 인문학 시장의 지평을 넓혔다. 미술사의 사회적 실천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10개월 남짓 복역했다.


혜민은 …

서울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 석사, 프린스턴대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매사추세츠주의 햄프셔대에서 종교학 교수로 8년간 재직했다. 현재 뉴욕불광선원 부주지다. 하버드대 대학원 시절 출가한 불교 승려다. 뉴욕 불광선원의 휘광 스님이 은사다. ‘마음 치유의 동반자’ ‘트위터 스타’ ‘한국 승려 최초의 미국 대학 교수’ 등 수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베스트셀러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저자다. 저소득층 아동에게 ‘가난의 대물림을 끊어주자’는 취지로 복지·건강·교육의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위스타트 운동의 홍보대사로 3년째 활동 중이다.

원문보기 : http://joongang.joins.com/article/396/16419396.html?ctg=2002&cloc=joongang%7Chome%7Cnewslist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