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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브리 스튜디오는 세계 애니메이션 역사에 우뚝 솟은 산이다. 그 산에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의 토토로’ ‘반딧불의 묘’ ‘붉은 돼지’ ‘추억은 방울방울’ ‘원령공주’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은 기암괴석 봉우리들이 즐비하다. 이같은 지브리의 신화를 얘기할 때 흔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떠올리지만, 그 혼자서 이룬 세상은 아니다. 가장 믿음직스러운 동료이자 현실적인 작품세계를 추구하는 경쟁자이기도 한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 회사의 살림살이를 꼼꼼히 챙겨온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 멋진 음악으로 작품에 화룡점정을 찍어온 음악가 히사이시 조, 그리고 그의 손과 발이 된 재주꾼 애니메이터들이 없었더라면 지브리 신화는 탄생할 수 없었다.

그런 지브리 스튜디오의 모든 역량이 집약된 최고의 작품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이다. 일본에서 2400만명이라는 엄청난 관객을 끌어모은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으로는 대단히 이례적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한데 이어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부문상 등 무수한 영화제의 주요 상을 휩쓸었다. 이미 국내에서도 보신 분들이 많은 이 14년 전 작품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이 영화가 한 소녀의 성장기를 매우 흥미롭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10살 먹은 소녀 치히로는 부모님과 새 집으로 이사를 가는 중이다. 친구들과 헤어진 아쉬움으로 얼굴엔 짜증이 가득하다. 그런데 아빠의 차가 이상한 터널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 식당에 차려진 음식을 허락도 없이 먹은 부모님은 돼지로 변하고, 이제 치히로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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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열살 소녀에게 세상은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다. 마침 하쿠라는 소년의 도움으로 온천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지만 이곳 주인인 마녀 유바바는 치히로의 이름을 센(千)으로 바꿔버린다. 이때 하쿠가 말한다. “유바바는 상대의 이름을 빼앗아 지배를 한다. 본래 이름은 확실히 숨겨둬.” 이름이란 무엇인가. 바로 남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표상 아니던가.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자기 이름의 소중함을, 자존심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미야자키 감독의 메시지로 나는 읽혔다.

사실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화두가 “살아남아라”다. 살아있어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것에 대한 존중은 자연스럽게 환경의 소중함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오염된 신이 욕탕으로 들어왔을 때 센은 더러운 몸 속으로 직접 들어가 온갖 쓰레기를 빼내고 덕분에 강의 신으로부터 선물을 받는다.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진정성 있는 태도가 어떤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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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을 앞둔 마지막 장면, 유바바가 센에게 문제를 낸다. 열두 마리 돼지 중 부모님을 맞추면 자유를 찾게 된다는 것. 돼지를 지켜보던 센이 마침내 말한다. “부모님은 여기 안 계세요!” 그러자 유바바가 갖고 있던 계약서는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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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 이 대목이 의문이었다. 부모님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그 뒤로 몇 번 작품을 보면서 문득 깨달았다. 치히로는 어느새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됐고, 그만큼 자랐으며, 그래서 그냥 알 수 있었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의 매력이 음악이다. 주제가인 ‘언제나 몇 번이라도’(작곡·노래 키무라 요미, 작사 카쿠 와카코)는 서정적인 선율로 작품의 메시지를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가사도 함께 음미한다면, 더욱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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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 있는 마음의 어딘가 안에서 / 언제나 마음이 두근거리는 꿈을 꾸고 싶다 / 슬픔은 다 셀 수 없지만 / 그 너머에서 꼭 당신을 만날 수 있다 /

되풀이되는 실수를 할 때마다 사람은 / 그저 푸른 하늘의 푸름을 깨닫는다 / 끝없이 길은 계속되어 보이지만 / 이 양손은 빛을 안을 수 있다 /

헤어질 때의 고요한 마음 / Zero가 되기 때문이지만 귀를 기울이고 들을 수 있다 / 살아있는 불가사의 죽어가는 불가사의 / 꽃도 바람도 거리도 모두 똑같아

(간주)

부르고 있는 마음의 어딘가 안에서 / 언제나 몇 번이라도 꿈을 그리자 / 슬픔의 수를 다 말해 버리는 것보다 / 입맞춰 살짝 노래 부르자 /

닫혀 가는 추억의 그 안에서 언제나 / 잊고 싶지 않은 속삭임을 듣는다 / 산산조각으로 깨어진 거울 위에도 / 새로운 경치가 비춰진다 /

시작의 아침의 고요한 창 / Zero가 된 몸 채워갈 수 있다 / 바다의 저편에는 이제 찾지 않는다 / 빛나는 것은 언제나 여기에 / 내 마음속에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글 : 정형모(중앙SUNDAY문화에디터)

사진 : 스튜디오 지브리(Nibariki – GNDD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