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절망과 싸우는 힘으로 살아간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누구나 똑같이 이해되는 단순한 것이 아닌,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열린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곰곰 곱씹을 수 있고, 그럴 때마다 ‘그게 이런 뜻이었구나’ 하는 깨달음도 줄 수 있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2012)는 그런 작품이다. 얀 마텔의 동명 원작 소설을 ‘와호장룡’의 이안 감독이 스크린으로 옮겼다. 이 소설은 영국의 유명한 문학상인 부커상을 2002년 수상했으며 40개가 넘는 나라에서 출간돼 70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다.
주인공은 피신 몰리토 파텔. 하지만 아이들이 자신을 ‘오줌싸개(pissing)’라고 놀리자 앞의 두 글자만 따서 스스로를 ‘파이(Pi)’라고 불러달라고 말한다. 인도에서 작은 동물원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지원이 끊기자 가족과 함께 이민을 결심한다. 그리고 동물들과 함께 캐나다로 떠난다. 하지만 태평양 한가운데서 배는 폭풍을 만나 침몰한다. 작은 구명보트 안에 살아남은 것은 파이와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 그리고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의 벵골산 호랑이 뿐. 다른 동물들은 곧 죽고 망망대해 위에는 열일곱 살 먹은 소년과 무시무시한 호랑이만 남는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얼마 남지 않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파이에게 더욱 절실한 것은 눈앞의 호랑이였다. 소년은 보트 안에 있던 구명조끼와 기구들을 이용해 미니 보트를 만들고 그 위에서 지낸다.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언제 호랑이의 밥이 될 지도 모른다. 살아있어야 구조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에게 한 뼘 그늘은 이전까지 몰랐던 소중함이었다. 또 양동이나 칼 같은 단순한 물건이야말로 가장 귀한 보물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생각한다. ‘무엇보다 희망을 잃어버리면 안 돼.’ 역설적으로 호랑이는 파이가 살아있게 해준 힘이었다. 절망과 싸울 수 있었던 동력이었던 것이다. 파이 역시 이렇게 생각한다. ‘녀석을 보면 긴장했고 녀석을 돌보는 것에 삶의 의미를 두었다.’
소년이 바다를 표류하는 227일간의 여정을 이안 감독은 할리우드 최고의 특수효과 팀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3D 영상을 통해 관객에게 시각적 충격을 선사한다. 눈앞에 펼쳐지는 황홀하고 신비한 세계는 사실과 환상을 자유롭게 오간다. 마침내 구명보트가 멕시코 해변 어딘가에 도착하며 소년의 227일간의 표류기는 해피엔딩으로 마치는 것 같지만, 작품은 그렇게 단순하게 끝나지 않는다. 침몰원인을 조사하러 온 일본의 선박 관계자들이 호랑이와 함께 지냈다는 이야기를 못 미더워하자, 파이는 문득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사실 배에 탄 것은 동물이 아닌 사람이었다고, 못된 요리사(하이에나)가 다른 선원(얼룩말)에 이어 자신의 어머니(오랑우탄)를 죽였기에 자신도 그 요리사를 죽일 수밖에 없었노라고.
영화를 보던 관객들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게 되는 대목이다. 과연 무엇이 진실인가. 만약 후자가 진실이라면 ‘리처드 파커’는 또 누구인가. 하지만 작가는 무엇이 진실인지 되묻지 않는다. 보여주지도 않는다. 단지 이렇게 묻는다. “어느 이야기가 더 나은가요?”
그렇다. 삶은 이야기다. 어느 이야기를 고를 것인지는 듣는 사람의 마음이다. 내가 고른 이야기는, 파이가 살아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찌됐든 그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어릴 적 수영을 배우며 들었던 선생님의 한마디 말씀 덕분 아닐까하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널 해치는 것은 물이 아니야, 공포심이지.”
글: 정형모 중앙SUNDAY 문화에디터 hyung@joo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