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와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배울 수 있도록

김포의 한 미술관에서 생태놀이 수업을 할 때의 일이다. 그날은 아이들에게 땅 밑·땅 위·하늘의 ‘살아 있는 것’을 그리게 하고, 그린 것을 오려 주워 온 나뭇가지에 달아 3층 모빌을 만드는 놀이를 했다. 놀랍게도 ‘식물’을 그리는 아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땅 밑’의 생명들을 떠올린 아이들도 없었다. 아이들은 주로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이나 새와 곤충을 그렸고, 게임이나 만화에서 본 용 같은 상상의 캐릭터를 그리는 아이들도 많았다.

생태놀이를 하며 만난 도시의 아이들은 대체로 처음에 두 가지 모습을 보여 준다. 자연을 무섭거나 더럽다고 생각하거나, 쓰고 버리는 물건처럼 함부로 대한다. 이 아이들에게 흙은 옷과 몸을 더럽히는 오염물질이며, 벌레는 피하고 싶은 무섭고 귀찮은 것이고, 꽃·열매·곤충은 내 맘대로 꺾거나 밟아 죽여도 되는 하찮은 것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아이도 너처럼 살아 있다’라는 말을 계속 반복해서 해 주면 생명 현상이 어떤 것인지 그 내용을 잘 몰라도 아이들의 태도가 조금씩 바뀐다.

생태놀이의 가장 큰 목적 중에 하나는 바로 내 주변의 자연 환경이 모두 나처럼 ‘살아 있는 것’들이 있는 곳이며,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아이들을 자연에 많이 노출시키는 일은 자연의 뭇 생명들을 예민하게 인지하게 만드는 일이며, 그것들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일깨우는 일이다. 이렇게 개발된 감각은 고스란히 인간관계에도 적용된다. 아이를 성숙한 인간으로 키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곳이 바로 공생의 원리로 움직이는 자연이다. 이 세상에는 결코 ‘하찮은’ 생명은 없으며 인간을 포함해 생태계에서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은 결코 없다는 ‘관계’의 진리를 가르쳐 주는 곳이 바로 자연이라는 위대한 교실이다.

몸을 ‘제대로’ 쓰는 아이로 자랄 수 있도록

오감을 다 동원해 풍부한 감각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요즘 아이들에게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현대인들이 압도적으로 의존하는 감각은 단연 시각이다. 아침에 눈을 뜬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심지어 걸을 때조차도!) 핸드폰과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주 많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요즘 같은 언택트 시대의 아이들은 처지가 더 딱해졌다. 더 많은 시간을 실내에, 의자에 갇혀 있고 몸을 움직일 일이 더 없어졌다. 핸드폰과 컴퓨터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는 것 같지만 쉽게 증발해 버리고 만다. 의자에서 작은 모니터로 만나는 지식과 즐거움이란 알고 보면 삶 속에서 지속력도 떨어지고 큰 힘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에게 나뭇잎을 그려 보라고 하면 보통 타원에 가느다란 선을 그어 놓는다. 그리고 실제로 나뭇잎을 주워서 관찰한 후에 그려 보게 하면 아주 다양한 결과물이 나온다. 안 보고 그린 것들은 대체로 비슷한 모양이지만, 실제로 보고 그린 나뭇잎은 하나하나 매우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이들은 보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관찰하면서, 우리 모두가 다르게 생긴 것처럼 나뭇잎도 모두 하나같이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생태놀이는 놀잇감을 아이들 스스로 몸을 움직여 찾게 하고 그걸 오감을 동원해 온몸으로 ‘경험’하게 한다. 진달래와 철쭉이 수술 개수가 몇 개인지 유명 시리즈 만화책으로 배운 아이와, 이름은 몰라도 실제로 산에서 진달래를 눈으로 보고 만져 보고 화전까지 부쳐서 먹은 아이의 경험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후자 쪽이 의미 있는 지식이 된다. 흙 만지는 것을 주저하던 아이도 일단 한번 손에 흙을 묻히게 되면 집에 가는 시간을 잊을 정도로 그 시간에 흠뻑 빠져 든다. 그리고 그 경험을 결코 잊지 못한다. 깊은 곳에 파낸 흙이 촉촉하다는 것도, 작은 벌레가 그 안에 살고 있다는 것도, 설명할 수 없는 기분 좋은 냄새가 난다는 것도 아이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힌다. 이 모든 자극들은 아이들이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확장시킨다.

생각이 깊어지고, 새로운 생각이 자랄 수 있도록

처음 아이들과 생태놀이를 할 때는 ‘뭔가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하지만 뭔가 가르치려 하는 순간, 아이들의 호기심과 집중력이 급속하게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좌절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냥 풀어 놓으면 ‘알아서 움직이고 원하는 것을 찾고 만들고 배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창의력 상상력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당연히 앉혀 놓고 억지로 주입시킨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새로운 자극이 있어야 발현되는 것이고, 많은 경우 주변의 것들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연이야말로 아이들의 ‘자발적인’ 호기심을 샘솟게 하며 어마어마한 상상력을 부추기는 공간이다.

자연은 늘 탄생과 죽음이 순환하는 ‘변화’의 공간이다. 늘 그곳에 같은 모습으로 있는 것 같지만, 자연은 결코 한시도 같은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곳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늘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고, 새로운 생각을 부추기는 자연이라는 놀이터가 위대한 이유다. 새로운 것이 창조되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인다는 면에서 ‘예술, 자연, 놀이’는 사실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자연스럽다’라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스스로가 ‘자연스러워질’ 수 있는 곳, 예술과 놀이가 ‘자연스럽게’ 태어나는 곳, 어른도 아이도 그런 곳에서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