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 민 스님

연말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우리 마음은 한 해를 쭉 돌아보게 된다. 보통 열 사람의 칭찬보다 한 사람이 건넨 상처의 말이 두고두고 가슴에 남듯, 한 해를 돌아보면 좋았던 일보다 후회되거나 가슴 아팠던 순간들이 마음속 사진이 되어 오랫동안 선명하게 남는다. 한 해를 돌아보는 마음도 이럴진대 한 생을 돌아보는 마음은 오죽할까? 

며칠 전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지신 지인의 병문안을 가게 되었다. 한창 나이인 50대에 갑자기 큰 병을 얻어 투병생활을 하시던 중 승려인 나를 꼭 한번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 와서 찾아뵙게 되었다. 종교인은 일반 사람들보다 이런 만남에 익숙하고 죽음과도 친숙한 편이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분들과의 만남은 솔직히 쉽지 않다. 그분에게 이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을 뵙자마자 나도 모르게 그분의 손을 꼭 잡고 눈을 바라보았다. 손에서 전해오는 따뜻함과 세상에 대한 경계를 풀어놓고 무장해제한 소년의 눈빛에서 그분의 마음이 느껴졌다. “가족이나 친한 사람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다 하셨어요?” 내 질문에 그분은 주저하며 말씀하셨다. “아직 못했어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잘 몰라서…” 우리나라 가장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분 역시 가까운 이들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고마웠다는 말, 미안했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잘하시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하시면 돼요.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끄덕 하신다.

“혹시 가슴속에 담아둔 미워하는 사람이나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이 있으세요?” 내 물음에 잠시 생각하시더니 “살면서 적을 만들지는 않아서 특별히 떠오르는 사람은 없어요.” 하신다. 참 다행이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생의 마무리는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찌꺼기가 없어야 하는데 천만다행이었다. “그런데요 스님. 지금 와서 후회되는 게 한 가지 있어요. 내 가족과 건강을 뒤로하고 너무 일만 열심히 한 것 같아요. 쉴 줄도 모르고 놀 줄도 모르고, 왜 그렇게 바쁘게만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보통 열심히 사는 것을 덕으로 여기지만 죽음 앞에서 돌이켜보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쉬는 날도 없이 일만 했는지 강한 허탈감을 느끼게 된다. 이 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죽기 전에 하는 가장 흔한 후회 중 하나라고 한다. 좀 편안해져도 되었을 텐데, 좀 행복해져도 되었을 텐데, 평생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기만 했지 왜,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달리는지는 묵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가만히 보면 열심히 살아야 먹고살 수 있고 내 가족이 행복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그렇게 달려왔을 것이다. 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래야 나와 내 가족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편안히 살 수 있으니까. 그렇게 평생 일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긍정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돈이 행복의 절대 조건은 아니라고 한다. 절대빈곤층에는 돈이 행복에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지만 어느 정도 먹고살 만큼 가지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돈이 행복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돈만을 좇게 되면 도중에 멈출 수 없는 일종의 중독 현상이 일어나 행복과는 오히려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스님, 평생 가족과 제대로 된 여행 한번 가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됩니다. 일만 한다고 친구들과 관계가 소홀해진 것 역시 안타까워요.” 그분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의 눈물인 듯했다. “거사님, 지금이라도 가족과 대화를 많이 나누세요. 친구들에게도 연락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전화를 하시고요.”

긍정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돈이나 일보다 더 중요한 행복의 요소는 끈끈한 관계에서 오는 행복감이다. 친한 친구들이 주변에 항상 다섯 명 이상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혼자 지내는 외톨이 생활보다는 봉사단체나 종교단체, 운동모임 등에 속하기를 권유하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이 통장에 돈만 많이 쌓이면 곧 행복해질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돈으로 여행과 같은 경험을 사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한 일이다. 물론 평생 쌓을 줄만 알았지 쓸 줄은 모르는 보통의 우리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분께 곧 다시 찾아뵙겠다는 인사를 하고 나오면서 만약 내가 내일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지난 한 해 동안 나 때문에 서운했던 사람은 없는지, 그리고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을 가슴속에 담아두고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혜민 스님

원문보기 : http://joongang.joins.com/article/821/13495821.html?ct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