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에포크(belle époque)’는 ‘좋은 시대’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이다. 19세기 말 유럽은 사회, 경제, 과학 기술 등 전 분야에 있어 그야말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냈고, 이를 바탕으로 한 번영과 풍요로움 속에서 예술 또한 그 꽃을 피워냈다. 예술가들은 이전의 예술사조인 낭만주의에 반발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문학에서는 상징주의, 미술에서는 인상주의를 탄생하게 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하는 찰나의 순간들을 화폭에 고정하게 했다면 그 순간들을 음악으로 담아낸 이도 있었다. 바로 클로드 드뷔시(1862~1918)다.

드뷔시는 상징주의 작가들이나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통적인 작법이나 기교에 갇히길 강력히 거부했고, 일상에서 마주하는 악상들을 그저 자신의 자유로운 영혼과 무의식의 세계를 담아 몽환적으로 그려내길 추구했다. 이렇게 드뷔시에 의해 탄생한 사조가 바로 인상주의 음악(impressionistic music , 印象主義音樂)인 것이다. 드뷔시의 작품 중 인상주의 음악의 태동을 알리는 ‘달빛(Claire de lune, 1890)’이나 인상주의 음악의 시금석과도 같은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Prélude à L’après-midi d’un faune, 1894)’은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연주되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작품들이다. 1892년 30살의 드뷔시는 말라르메의 시 ‘목신의 오후’의 작곡에 착수한다. 원래는 전주곡, 간주곡, 종곡의 3부를 구상했으나 전주곡만으로도 완벽한 ‘시의 음악화’에 성공했다고 판단해 나머지는 작곡하지 않고 전주곡만을 남겼다. 착수한 지 2년 만에 완성했고, 1894년 프랑스 국민음악협회에서 초연돼 호평을 받으며 인상주의 음악에 있어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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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드뷔시는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통해 자신의 음악세계를 굳건히 다지는 데 성공했다. 자신의 음악 수준이 최고조에 도달했던 시기 드뷔시는 차기작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고통스러운 창작으로부터의 도피였을까. 결혼생활 중에도 끊이지 않았던 외도로 사회적 물의와 비난을 몰고 다녔던 드뷔시는 또다시 문제적 사랑에 빠지게 된다.

바로 드뷔시가 가르치던 학생의 어머니였던 엠마 바르닥(1862∼1934)이란 이름의 여성이었다. 심지어 엠마 바르닥 역시 가정이 있는 유부녀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드뷔시 아내 릴리의 귀에까지 전해졌고 배신감을 견뎌내지 못한 릴리는 급기야 권총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기까지에 이르렀으나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1904년 이 한바탕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고자 드뷔시는 엠마 바르닥과 함께 영국령의 저지섬으로 도피여행을 떠나게 되고 1905년 다시 파리로 돌아왔을 땐 드뷔시와 엠마 바르닥은 사실상 부부가 돼 있었다. 이견이 없을 부도덕한 행태지만 드뷔시에게 있어선 인생의 격랑과도 같던 시기이자 작가로서 정점인 원숙기였다. 바로 이 시기에 작곡된 작품이 ‘바다, 3개의 교향적 스케치(La mer, trois esquisses symphoniques pour orchestre, 1904)’다.

드뷔시는 바다를 좋아했던 작곡가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 그의 인상주의 작풍은 묘사를 통한 구체적인 표현으로 노래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모티브 또한 그의 눈과 귀에 담겼던 바다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일본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안에 몰아치는 거대한 파도 아래에서’라는 판화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의 힘으론 결코 거스를 수 없는 거센 파도, 고요함 속에서 언제라도 급변할 수 있는 바다의 웅장함과 불안정의 인상을 담아낸 것이라 해석되고 있다.

젊은 시절 천재 작곡가 드뷔시의 탐미욕은 음악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 넉넉지 못한 주머니 사정에도 불구하고 양장본의 희귀 서적이나 아시아의 이국적인 판화 그림, 도자기 같은 고가의 골동품들마저도 자신의 눈에 든 물건은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만 직성이 풀렸다. 가난한 학생 시절에도 고급 살롱을 드나들며 사교 활동을 즐겼고, 숱한 여성들과 염문설을 뿌렸던 여성 편력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그의 애인 중 한 명이었던 가브리엘 뒤퐁이란 이름의 여인은 드뷔시의 변심에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할 정도였으며, 부인이었던 로잘리 텍시에는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까지 한 바 있다.(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이 모든 원인은 오직 드뷔시의 무분별한 남녀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년의 나이가 된 드뷔시는 1904년 42세의 나이로 로잘리 텍시에와 이혼하고 엠마 바르닥이라는 여인과 재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05년 10월 30일 드뷔시는 엠마 바르닥과의 사이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딸을 얻게 된다. 두 부부는 드뷔시의 이름인 클로드와 바르닥 부인의 이름인 엠마에서 각각 이름을 따와 딸에게 클로드 엠마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그리고 덧붙여 슈슈라는 애칭까지 지었다.

마흔이 넘은, 당시로선 상당이 늦은 나이에 첫 자식을 얻게 된 드뷔시는 매일 매일이 천국만 같았을 것이다. 일순에 ‘딸 바보’가 돼버린 드뷔시는 사랑스러운 딸 클로드 엠마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됐고, 그 동심 어린 눈에 투영됐던 상상의 나래들을 특유의 몽상적 색채를 더해 작품을 그려냈다. 나이가 먹어서도 유독 천진난만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어렸을 때의 특별한 추억들을 남들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하며 살아간다. 드뷔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드뷔시는 어렸을 때의 추억과 기억 풍경들을 고스란히 기억해 내 다 큰 어른의 시선으로 담아, 딸에 대한 각별한 감동과 사랑을 담아 음악으로 탄생시켰는데 바로 <어린이 세계>라고도 불리는 <어린이 차지>라는 작품이다.

제목인 ‘어린이 차지(Children’s corner)’란 ‘어린이가 차지한 영역’쯤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쉽게 풀어 말하자면 ‘어린이가 차지한 세상’, 작곡가인 한 어른이 동심으로 바라본 ‘어린이의 세상’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드뷔시는 딸이 태어난 이듬해인 1906년 작품의 제3곡인 ‘인형의 세레나데’를 먼저 작곡했고, 1908년까지 총 3년에 걸쳐 완성했다. 전체 작품은 제1곡 ‘그라뒤스 아드 파르나슴 박사’, 제2곡 ‘코끼리의 자장가’, 제3곡 ‘인형의 세레나데’, 제4곡 ‘춤추는 눈송이’, 제5곡 ‘작은 양치기’, 제6곡 ‘골리워그의 케이크워크’ 등 총 6곡으로 이뤄져 있다.

프랑스인인 드뷔시는 이 작품의 제목과 각각의 부제들을 영어로 작명했는데, 여기에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당시 사랑스러운 딸 클로드 엠마는 영어 공부에 한창이었는데 막 영어공부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딸에게 작은 즐거움을 더해주기 위한 드뷔시의 세심한 배려였던 것이다.

작품은 ‘소중하고 귀여운 슈슈에게’라는 헌사와 함께 사랑하는 딸 클로드 엠마(슈슈)에게 헌정되었으며 1908년 12월 파리의 세르클 뮈지칼에서 이뤄졌다. 총 6곡 중 가장 사랑받는 작품은 스페인풍의 이국적 세레나데 제 3곡 ‘인형의 세레나데’로, 아이가 인형 선물을 받았을 때의 기쁨과 행복한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