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골 산책로는 공동묘지다. 전설의 고향에 나올 법한 으스스한 공동 묘지를 비오는 밤이면 걷는다…라는 것은 아니고 삶을 고요하게 성찰할 수 있는 곳,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걷는다. 이곳이 내 단골 산책로인 이유는 고요한 분위기 때문이다. 골목마다 술 냄새가 배어 있는 홍대 앞 골목을 걷다가 절두산으로 향하는 경사로를 올라가다 보면 양화진 묘원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 도착하면 마치 회전하는 무대 장치처럼, 홍대 앞의 번잡함이 일순간 고요한 정적으로 바뀐다.
머리가 복잡한 저녁 무렵에 이곳을 가보라. 언덕을 따라 난 오솔길을 걸으면 인생의 마지막 집들이 점점이 놓여있다. 돈 잘 벌면 더 넓은 평수로 이사가기 위해 살아가던 우리가 결국 다다른 곳은 단순한 돌기둥 하나 세워놓은 한 평 남짓한 집이다. 주변에는 무심히 계절을 알려주는 꽃나무가 심어져있다. 공동묘지라기보다는 감춰진 비밀 정원 같은 느낌이 든다. 특유의 고요한 분위기도 좋지만 공동묘지 산책의 또 다른 묘미는 가끔 걸음을 멈추고 비석에 쓰인 비문을 읽어보는 것이다.
줄리아 듀랙(Julia Agnes Durack, 1925—1974): 줄리아 듀랙은 양화진에 안장된 유일한 천주교 수녀로 디트로이트의 머시 간호대학에서 공부한 후 1955년 메리놀 수녀회에 들어갔다. 그는 1966년 한국에 온 뒤 부산 메리놀 병원 산부인과 개설에 참여했으며, 이후 간호 선교사로 헌신했다.

안내판에는 줄리아 듀랙이 겪은 말년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우리나라를 위해 봉사하던 그는 47살에 암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듀랙은 어찌 된 일인지 마지막 삶을 한국에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평범한 사무직에 종사하며 마지막까지 가난했던 대한민국의 이웃을 위해 헌신한 후 1974년 숨을 거둔다. 그녀의 장례식은 절두산 순교자 기념성당에서 거행되었고, 유해는 유언에 따라 세브란스 병원에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되었다. 그리고 양화진 묘원에 안장된 유일한 수녀로 남았다.
고대 로마에서는 개선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 한 명을 옆에 앉히고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악담을 하게 했다고 한다. 라틴어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도 죽는다! 승리했다고 우쭐대지 마라!” 요즘으로 치면, 큰 거래 건을 따고 기뻐하는 사장님 옆에서 한 직원이 “그래 봤자 언젠가는 망한다!”라고 찬물을 끼얹는 셈이다. 참으로 철저한 ‘자만심 브레이크’다.
하지만 인간은 이 브레이크가 없으면 금세 과속하기 마련이다. 죽을병에 걸려서야 비로소 하루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니까. 그래서 우리에겐 일상 속에서 죽음을 일깨워줄 공간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이 묘원이 바로 그 역할을 한다.
죽고 나면 우리 인생은 줄리아 듀랙의 묘비문처럼 몇 문장으로 요약될 것이다. ‘조성익은 ○○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빈칸에 들어갈 한두 단어를 위해 매일 아침 출근하고, 사랑하고, 싸우고, 다시 화해하며 산다. 그 빈칸에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었다거나 ‘크게 재력을 쌓은 사람’이었다고 채워져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줄리아 듀랙을 기억하라. 자신의 묘비가 ‘타인을 위해 삶을 산 사람’이라 기록된다면, 미래에 묘비 앞을 산책할 이들에게 기분 좋은 울림을 줄테니.
언덕을 내려와 술 냄새가 더욱 진해진 홍대의 거리를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죽음을 기억하며, 내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생각 하며, 내 삶의 각도는 조금 바뀌어 있었다.
*이 글을 조성익의 책<건축가의 공간일기> (북스톤) 에 실린 내용을 재구성했습니다.
🖋️글 | 조성익
홍익대학교 교수 / TRU 건축사무소 대표 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