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여행을 좋아한다. 여행은 비일상의 경험이기 때문에,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 다른 장소, 다른 경험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영화 주인공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점심에 뭐 먹지?”라는 평범한 질문도 여행지에서라면 새로워진다.

여행은 설렘과 함께 시작한다. <비포 선라이즈>의 이십대 중반인 두 주인공 제시와 셀린느는 기차에서 만난다. 제시는 미국에서 유럽으로 여행을 와 일정의 끄트머리에 다다랐고, 파리에서 대학을 다니는 셀린느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기차 안에서 다투는 사람들 때문에 우연히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다가 이야기가 점점 길어진다. 영화의 초반은 기차 안에서 길게 이어진다. 학교를 다니는지, 일을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 대화는 각자의 꿈과 소망, 삶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출처 : 영화 <비포 선라이즈>

여행의 신비. 우리는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 대화할 때, 뜻밖에도 친구나 가족에게도 하지 않던, 혹은 못하던 이야기를 선뜻 털어놓곤 한다.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이라는 안도감이 마음 속 벽을 허무는 것이다. 나는 <비포 선라이즈>와 그 후속작인 <비포 선셋>의 각본 번역을 했는데, 초반 기차 장면에서 셀린느는 이런 말을 한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사랑에 빠지거나 결혼하거나 아이를 가질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한 적이 없어. 내가 아이였을 때에도 부모님은 내가 TV 뉴스 캐스터나 치과의사 같은 장래 직업을 꿈꾸기를 원했거든.” 부모님의 기대를 실감하며 청소년기를 보내고 성인이 되어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기에, 셀린느는 기차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게 그런 압박감에 대해 말한다.

출처 : 영화 <비포 선라이즈>

그 말을 들은 제시의 대답은 이렇다. “부모님은 자식이 멋진 직업을 갖게 해서 친구들에게 자랑할 거리를 만들고 싶어 하니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대화는, 기차 안의 이방인들이 서로에게 자연스러운 친근함을 발전시킬 수 있게 서로의 방향으로 등을 떠밀어준다. 대단히 극적인 장면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를 보는 사람도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다. 1990년대부터 아주 긴 시간 동안 <비포 선라이즈>가 유럽 배낭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던 이유는 이것이었다. 어쩌면 나도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소소한 듯 중요한 고민을 이야기하며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낭만적인 상상.

출처 : 영화 <6번 칸>

같은 유럽 기차라고 해도, <6번 칸>에서 만난 두 사람은 여러모로 다르다. 라우라는 핀란드에서 온 유학생으로 모스크바에서 고고학을 공부한다. 연인과 함께 1만년 전에 새겨졌다는 암각화를 보러 여행갈 계획을 세우지만, 연인이 여행을 못 가게 되면서 혼자 기차에 오른다. 2등석 객실 6번 칸에 탄 라우라와 같은 칸에 탄 료하는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열차가 출발하기 무섭게 술을 마시고 아무리 좋게 말해도 무례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이어간다. <비포 선라이즈>가 첫눈에 반할만한 상대와 편안한 대화로 인연을 시작한다면, <6번 칸>은 그 악몽 버전처럼 보인다. 솔직히 말해, 빨리 이 칸을 벗어나 도망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엄습한다. 하지만 달리는 기차에서 도망칠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6번 칸>은 의외성을 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라우라의 상황에 처하면 SNS에 글을 올릴 것이다. “같이 탄 사람 너무 이상함.” 모든 면에서 양극단인 두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순간을 이 영화는 만들어낸다.

출처 : 영화 <6번 칸>

<비포 선라이즈>에서 여행은 하염없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주인공들 앞에 보여준다. 기꺼이 기대고 싶은 우연과 우연을 엮어, 이 만남에 미래가 있기를 기대하게 한다. <6번 칸>에서 인생은 그린 것처럼 완벽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낯선 사람, 나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에 대한 불편함을 한껏 강조해놓고, 편견은 편견일 뿐이며 기적을 만드는 데는 혼자로는 부족하다고 속삭인다. 영화는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은 영화 속에서 한없이 충만해진다.

🖋️글 | 이다혜
씨네 21 기자 / <영화의 언어>, <오래된 세계의 농담> 작가